2020년 11월 ‘여성역사공유공간’으로 개관
여성사 기획전시·연구, 장서 997권 등 보유
서울시 “성과 점수 낮다”며 사업 종료했지만
이용객 21년 1388명→22년 4568명 3배 늘어
아동·노인시설 등 입주 희망하는 기관 없자
“내년 ‘도서관 포함 시민이용시설’ 운영 검토
연구 기능은 여성가족부 사업과 연계해 지속”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가 지난 10월 31일 서울시와의 위탁 종료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출처=서울여담재 누리집)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가 지난 10월 31일 서울시와의 위탁 종료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출처=서울여담재 누리집)

서울시가 조례까지 개정하며 지원했던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여담재)가 개관 3년만에 문을 닫는다. 지난 8월 서울 시내 소규모 사업장 성희롱성폭력 사건 대응을 책임져온 ‘위드유센터’가 사라지고 두 달 만이다. 정부 부처에서는 여성폭력이나 지원 관련 예산이 줄줄이 삭감되는 등 윤석열 정부의 ‘성평등 퇴행’ 흐름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여담재는 서울여성의 역사를 연구·기록하고, 전시·교육을 통해 성평등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지난 2020년 11월 서울시가 설립한 공간이다. 

수탁기관인 사단법인 여성문화예술기획은 3년간 ‘양성평등주간 기념 특별전: 역사가 된 여자들’ ‘우리 안의 여신을 찾아서’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 바치다’ 등 여성사 관련 기획전시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997권에 달하는 페미니즘·여성사 관련 장서로 도서관의 역할도 톡톡히 해왔다.

하지만 지난 10월 31일자로 사업이 종료돼 시민들은 더 이상 이곳을 이용할 수 없다. 서울시는 지난 4월 여담재에 대해 ‘민간위탁 종합성과평가’(종합평가)를 시행한 결과, 점수가 56.2점으로 재계약 배제 사유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어 이같이 결정했다.

서울 여담재 전경. (사진=이충열 씨 제공)
서울 여담재 전경. (사진=이충열씨 제공)

이에 여담재에서 전시를 열었던 예술가를 중심으로 운영을 계속해 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여담재 존치’ 연서명에도 1000여명이 참여하는 등 많은 시민들이 동조하고 있다.

지난 7~9월 여담재에서 초대전 ‘당신은 누구십니까’를 열었던 예술가 이충열씨는 ‘이용률 등 성과가 낮다’는 서울시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씨는 “전시 기간에 출근하듯이 매일 들렀는데, 지하 도서관에는 테이블 빈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근 어린이, 양육자, 노년 여성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서울시 2023년 성인지예산’ 보고서에 따르면, 여담재의 2021년 이용객 수는 1338명, 2022년 이용객 수는 4568명으로 3배 이상 늘었다. 이마저도 건물에 출입구가 많음에도 한 곳에서만 사람이 수기로 작성해, 실제 방문자보다 적게 측정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4월 여담재에 대해 종합평가를 실시하고 △협약기간 내 지적사항 34건 발생 △여성인물 발굴사업 미흡 등을 이유로 75점 미만을 받았다며 재위탁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1년 예산이 5억원 미만인 여담재는 통상적으로 종합평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종료를 위해 평가를 시행해 점수를 낮게 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시는 “조례 시행규칙상 ‘시장이 인정하는 경우’에는 종합평가를 할 수 있게 돼있다”며 “보통 위탁기간 만료 전에 점검요청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업 자체를 종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위탁기관을 공개모집할 수도 있었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그는 “(이전 수탁기관에) 위탁하지 않기로 한다면 다른 기관을 공모해야 하는데 그것도 하지 않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서울 여담재에서 전시를 열었던 이충열씨가 직접 만들어 단 ‘자주동샘’ 안내문. 우측 상단에 보이는 우물모양의 돌과 바위가 자주동샘이다. (사진=이충열씨 제공)
서울 여담재에서 전시를 열었던 이충열씨가 직접 만들어 단 ‘자주동샘’ 안내문. 우측 상단에 보이는 우물모양의 바위가 자주동샘이다. (사진=이충열씨 제공)

여담재는 각별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건물은 단종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던 ‘원각사’의 기둥과 대문을 살려 개조한 곳으로, 오랜 기간 방치돼 있다가 여담 재가 들어서며 비로소 활용의 기회를 얻었다. 바로 옆에는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가 궁에서 쫓겨난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비단을 염색했던 ‘자주동샘(자지동천, 자주색 풀을 물들이는 우물)’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했다는 근거가 되는 유적지로는 거의 유일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씨는 “바로 그 (자주동샘) 옆에 ‘여성역사공유공간’이 있다는 게 의미가 있다”며 “(국립)여성사전시관이 있는데 왜 여담재가 있어야 하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간 여성사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내용을 채우는 게 중요하다. 이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전문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21년 5월 서울시의회는 개정 조례안을 통해 여담재를 ‘서울시 여성관련시설’로 규정, 설치·운영 근거를 마련했다. 조례 개정 없이 사업종료를 추진하는 것에 절차적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서울시는 8일 여성신문에 “사업 조정에 따라 필요시 조례 개정이 가능”하다며 “서울여담재의 기능(여성사 자료발굴·연구, 자료관 운영, 교육·문화·전시사업)에 대해서는 중앙정부인 여성가족부 사업과 연계해 지속될 수 있도록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서울 여담재 내부 계단의 모습. 외부와 통해 있어 비나 눈이 들이치면 미끄러울 위험이 있다. (사진=이충열씨 제공)
서울 여담재 내부 계단의 모습. 외부와 통해 있어 비나 눈이 들이치면 미끄러울 위험이 있다. (사진=이충열씨 제공)

서울시는 당초 이를 아동시설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계단이 많고, 외부와 통해있어 눈비가 들어오면 미끄럽다’는 안전상 이유 등으로 입주하려는 기관이 없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시는 “시설활용과 관련해 종로구청과 협의한 바 있으나, 예산 문제와 적합한 사업 부재 등으로 이관의사 없음을 확인한 바 있다”며 “일정기간 정비를 거쳐 내년 하반기 중 ‘도서관을 포함한 시민이용시설’로 운영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이어 “지난 11월 2일 서울여담재에서 보관하고 있던 연구성과물 5종(구술채록, 연구보고서 등)과 도서 997권에 대해서 국립여성사전시관으로 이관했다”며 “이관된 자료는 국립여성사전시관의 ‘여성사아카이브’로 구축·정리해 누구나 열람 가능하도록 보관 및 전시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 정부 들어 ‘여성’ 관련 기관이 사라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8월에는 서울 시내 3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의 성희롱 예방교육, 사건 대응 등을 지원해온 위드유 서울직장성희롱성폭력예방센터(위드유센터)도 문을 닫았다. 최근 중앙행정기관인 여성가족부는 여성폭력 대응 관련 예산 142억원 등이 ‘재정 효율화’ 명목으로 삭감했고, 고용노동부는 민간 위탁해 온 ‘고용평등상담실’의 내년 예산도 ‘민관 연계 부족’을 이유로 전액 삭감했다.

이씨는 “없애는 게 많으니까 사람들이 체념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뭐 하나라도 살리고, 하나를 살리면 그다음 것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담재를 붙잡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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