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제공
사진 =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제공

바로 지난달 19일, 연령과 피부색이 다양하고 스페인어를 쓰는 도미니카 공화국 여성들을 열 명도 넘게 만났다. KOICA와 국제 여성가족교류재단이 협력해 추진한 도미니카공화국 젠더 기반 폭력 피해자 지원 인력 역량 강화 연수에서 자기방어 강연자로 초대받으면서였다. 

외국 여성, 특히 우리 문화권과 멀리 떨어진 나라의 여성을 만나면 가장 먼저 낯설다는 생각부터 든다. 그 낯섦이 신선한 동시에 얼마쯤은 나를 긴장시키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낯섦이 가신 자리를 다양함이 채웠다. 불균질한 저마다의 개성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자유분방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내가 프레젠테이션하는 도중에 크게 웃기도 하고 질문 시간이 아니어도 의문점이 있을 때마다 자유롭게 질문을 던졌다. 

워크숍이 진행된 장소는 호텔의 세미나홀이어서 아무래도 움직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방어 기술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면 지원자가 나와서 함께 해보기로 했다. 재단 소속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연수생들은 워크숍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자원해 보고 싶다면서 기대에 부풀었다고 했다. 

크고 분명한 목소리와 적극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요즘 유행하는 MBTI(엠비티아이·성격유형 검사)대로 분류하면 극도의 외향형, 즉 E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여러 명의 E 앞에서 내향형, I인 나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필 그날이 연수 마지막 날이어서 수료식이 준비돼 있었고 그들은 전부 격식 있는 옷차림이었다. 그런데도 기술을 서로 해보겠다고 손을 번쩍 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지면서 성큼성큼 맨발로 다가왔다.

사진 =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제공
사진 =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제공

한 연수생은 오빠와 친척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축구선수 집안 출신이라고 했다. 그 여성은 두 주먹을 쥔 채로 일명 ‘가드를 올린’ 자세를 취하면서 나왔다. 전반적으로 온순한 한국 여성이라면 E가 아니라 ‘트리플 E’라고 해도 좀처럼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질문 시간에 그들을 폭소하게 한 질문이 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남성의 낭심을 차는 게 도움이 되느냐?”였다. 그제야 한 번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남성 두 명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방을 챙겼다. 

워크숍이 끝나고 한참 생각했다. 한국 여성은 대부분 예의 바르고 튀는 행동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는 수업에서도 특별한 사람 한둘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조용하고 신중하다. 한 집단이 비슷한 체형에,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비슷한 말투를 쓰고 비슷한 사고의 결과로 비슷하게 행동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준화된 집단의 두드러진 특징은 두말할 것 없이 통제가 용이하다는 거다. 

물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지금 6살인 내 조카도 그 또래가 그러하듯 공주병을 앓느라 핑크와 드레스에 열광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조카는 뛰고 소리치고 까부는 에너지를 아직까진 잃진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론 사춘기 무렵부터 그 에너지를 급격히 잃어버렸다. 

그 후로는 튀는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웠다. 영화 ‘바비’의 망가진 바비가 읊는 대사처럼, 남자도 여자를 싫어하고 여자도 여자를 싫어한다. 여성에게 인색한 세상에서 혐오의 타깃이 되지 않으려면 그저 조용하고 순종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채로 기성세대가 되자, 너무 쉽게 여성혐오를 답습했고 그런 나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례로 성별이 다른 조카 둘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연하게 달랐다. 남자아이가 지나치게 장난스러운 건 남자라서 그런 것으로 쉽게 받아들였지만 비슷한 행동을 여자 조카가 하면 당황스러웠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편견에 제압당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튀는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히 적은 데는 이유가 있다. 똑같이 돌출적인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도 남성은 양해받지만 여성은 평판에 치명타를 입는다. 그래서 우리 여성들만이라도 튀는 여성에게 관대해야 한다. 우리가 획일화되고 평준화되지 않는 다양성을 지닌 집단이 돼야 지금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세상에 떨칠 수 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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