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책임의 하한선과 상한선 - 영화 ‘다음 소희’

영화 ‘다음 소희’의 배경인 2016년 콜센터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내가 콜센터에서 일하던 2020년에도, 7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하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영화 ‘다음 소희’의 배경인 2016년 콜센터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내가 콜센터에서 일하던 2020년에도, 7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하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서바이벌 게임

문제의식이 난무하는 힘겨운 영화는 어찌해야 하나. 요리조리 도망칠 궁리를 하며 불편해하는 관객의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돌리고 극장을 나서거나 화면을 꺼버리면 그만이지만 보기를 선택했으니 최소한 끝까지 보긴 해야 한다. 선택의 하한선이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책임에 있어서는 상한선과 하한선 중 어느 쪽으로 노선을 정해야 할까. 실제로 중도 노선을 택하며 이어져 가는 만큼 만족도 역시 아슬아슬하다. 여성 감독들이 당찬 유머 감각과 자신감으로 성장하기를 응원하면서 책임의 상한을 선택한다.

“엄마, 나 다른 회사로 옮기면 안 될까?” 열여덟 살 소희는 ‘회사 그만두면 안 될까’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보다도 이걸 왜 엄마에게 묻고 있는지 의아해하다가 ‘미성년’이라는 걸 기억해내지만 공감이 쉽지 않다. ‘다음 소희(next Sohee)’들이 차디차고 예민한 사고의 실천 강령을 세우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18세 소희가 12년 동안 다닌 학교에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

영화 <다음 소희>의 정주리 감독은 소희(김시은 분)를 둘러싼 사회 전반에 있는 어른들을 관객의 비난 혹은 비판에 노출시키고 있다. 이들은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진입한 소희가 배운 것과 무관한 곳에 입사하는 것과 적성대로 진학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는 뿌리 깊은 모순에 순응하고 있다. 또한 끊임없이 상사 혹은 상위 기관의 눈치를 보고 ‘조직의 생리’에 ‘종속’된 사회의 부속품으로서 미성년인 소희와 자신들을 동일시할 정도로 자의식 부재의 어른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생존을 위한 자기 변명에 쉽게 공감되는 만큼 표면화된 문제의식은 선명하지만 진부하다. 

소희 사망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관 유진은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라고 읊조린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소희 사망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관 유진은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라고 읊조린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줄기 빛

구멍가게 문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한 줄기 ‘빛’의 미장센은 소희가 기댈 언덕으로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빛의 상징인 ‘부모’의 모습은 매 장면 불편하고 희미하게 뭉개진다. 딸과 마주 앉은 식탁에서 보이는 엄마의 멍한 표정, 자해한 팔을 치료하고 돌아가는 차의 앞좌석에서 등을 돌리고 앉은 부모, 딸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엄마와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눈발. 부검해달라고 소리치며 책임을 전가해보려는 아버지의 몸짓, 딸의 꿈을 알지 못한 엄마의 회한이 적나라하다. 가난한 부모와 가진 게 많은 부모의 차이로 치부해보려 해도 쉽지가 않다.

자기 만족을 향한 길 위에 있지만 무겁기도 한 ‘책임’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감당하는 ‘바람직한 어른’인 콜 센터 팀장 이민호(심희섭 분)의 자살은 소희가 어른이 되는 길에 어둠을 드리운다. 성격의 강약에 앞서 사회 내 위치에서 생기는 고통의 처리 문제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자신의 대들보를 끌어안을 수 있을까. 남편의 죽음 앞에서 사회가 가하는 고문에 자조적인 아내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 또한 죽음을 선택한 어린 소희다. 힘겨운 책임의 상한선을 지켜낸 인간의 서바이벌은 사회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계속되는 안타까움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으니 답은 개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춤추는 소희는 사회의 일원이 아닌 ‘개인’을 표상하며 꿈은 개인의 존재 확인이다. 자신도 춤을 좋아하면서 ‘소희가 춤을 왜 추었느냐’는 형사 유진(배두나 분)의 물음은 가난한 소희에 대한 자연스런 의문인 듯 보이지만 꿈에 대한 무지와 억압을 드러내는 보통 어른의 사고를 대변한다. 그 어른들 역시 자신의 꿈의 존재와 실체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반증이다. 유진도 소희라는 ‘거울’에 자신를 투영한다.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을 직장 내 괴롭힘과 중간착취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직업교육훈련촉진법 개정안이 발의 1년여 만에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을 직장 내 괴롭힘과 중간착취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직업교육훈련촉진법 개정안이 발의 1년여 만에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최대한의 책임

어머니 이야기를 피하는 모습에서 고인이 된 어머니와의 편치 않은 관계가 유진이 휴직했던 이유로 추측되는 가운데 상사의 질책에 저항하며 계속되는 유진의 수사는 죽은 소희에게 주는 진혼곡이자 자신을 향한 이해와 위로, 또 다른 소희를 위해 준비하는 한 줄기 빛이다.

소희는 마지막 의지의 대상인 남자 친구 태준(강현오 분)을 찾아가지만 동료로부터 이유 없이 뒤통수를 맞고 농담인 척 던지는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본다. 태준 역시 고객의 언어폭력과 직장 내 노동 착취를 감내해야 하는 소희만큼이나 불합리한 세상에 던져져 있다.

“다음에 또 욱하면 나한테 말해. 경찰한테는 말해도 돼.” 남이 인정하는 것만이 책임의 속성은 아닐 테니 양심의 소리를 듣는 자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책임의 상한을 결정할 것이다, 누군가는 공감하고 곁을 지켜줘야 한다는 어른 유진의 책임감이 태준을 오열하게 할 때 함께 우는 관객이 보인다. 

필자: 문수인 작가. 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현재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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