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삶을 긍정했던 ‘사랑의 시인’...향년 96세

고(故) 김남조 시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고(故) 김남조 시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000편 가까이 시를 썼습니다. 가장 많이 쓴 건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곳에 다 있는 것입니다. 음식에 소금이 필요하듯이 사랑이 없는 행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2019년 6월20일 제47차 윈(WIN)문화포럼 특강에서)

고통 속에서도 삶을 긍정했고, 평생 크고 따스한 사랑을 노래한 김남조 시인이 10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6세.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재학 중 연합신문에 발표한 시 ‘잔상’, 서울대 시보에 발표한 시 ‘성수’로 등단했다. 첫 시집 『목숨』(1953)부터 『나아드의 향유』(1955), 『정념의 기』(1960), 『귀중한 오늘』(2007) 등 시집 140여 권을 펴냈다.

고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6·25전쟁으로 동생을 잃었다. 피란 간 부산에서 첫 시집을 발표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혼란한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삶과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했다. 모성의 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기독교 세계에 천착하며 다수의 신앙시를 남겼고 “기독교적 심연 가운데서 자아성찰, 인간성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다.

“너를 위하여/나 살거니/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이미 준 것은/잊어버리고/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나의 사람아” (‘너를 위하여’)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편지’)

한국 문단의 대표 시인으로 불리면서도 늘 ‘여류시인’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지난 2019년 등단 70주년 기념 여성신문 인터뷰에서 고인은 “누구 집의 며느리가 대낮에 책상을 펴고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던 시절”, “조혼의 풍습이 있던 시절이라 사랑의 대상이 된 남자들은 이미 기혼자여서 사랑한다는 자체가 치욕이 되었던 시절”을 회고했다. “현재의 여성문학인들에게는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은 없다는 점에서 행복해 보인다”고도 했다.

“나이 먹고 보니 세상이 크고 깊다. 그만큼 심각하고 아프다는 걸 느낀다. 모든 사람 안에 그의 비극이, 그의 슬픔이 보인다”던 시인은 90이 넘어서도 삶과 생명에 관한 시를 썼다. “행복을 찾는 능력이 중요하다. 하루하루를 고맙게 느낄 수 있고, 스스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만년의 으스름 저문 날을 살면서도,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하는 바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 삶의 본질, 그 의미심장함과 이에 응답하는 사람의 감개무량함, 살아가면서 더디게 성숙되어 가는 경건한 인생관, 이 모두 오묘한 축복이며 오늘 우리의 감사이자 염원입니다.” (17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2017) 머릿글 중)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3·1문화상, 만해대상, 일본지구문학상 등을 받았다.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남편 김세중(1928~1986) 조각가와 살던 서울 용산구 효창동 자택을 사재 50억원을 들여 2015년 리모델링해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으로 개관했다. 김세중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김세중 조각상과 김세중 청년조각상, 한국미술저작·출판상을 시상해 왔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될 예정이다. 발인은 1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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