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 명절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도
불편한 당신을 위한 영화·드라마 4편

명절이 반가운 대한민국 여성이 얼마나 될까. 친정 말고 시가에 가는 며느리들, 여성들만 떠맡는 명절 노동은 여전히 흔한 풍경이다. ‘결혼은 언제…’로 시작되는 질문 세례를 받는 비혼 여성들의 스트레스도 만만찮다.

여기 ‘명절 파업’에 나선 며느리들이 있다. 희생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단호히 ‘내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한 여자가 있다. 남은 연휴엔 가부장제의 틀을 깨는 여성들과 변화하는 남성들을 다룬 영화·드라마를 보며 현실의 답답함을 풀어 보면 어떨까. ‘부부는 하나’, ‘정상가족’이라는 환영을 지적하는 작품도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줄지도 모른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추진하는 대통령과 정부 고위 인사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이혼 요구도 경력 복귀도 당당하게! ‘닥터 차정숙’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주인공 차정숙(엄정화). ⓒJTBC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주인공 차정숙(엄정화). ⓒJTBC

시아버지 제삿날. 여자는 시어머니와 남편 앞에서 선언한다. “잘 배워두는 게 좋을 거야. 이젠 내가 없을 테니까. 오늘이 내가 차린 마지막 제사상이야. 우리 이혼해.”

차정숙(엄정화)은 불륜 남편에게 당당히 이혼을 요구하고, 순종을 요구하는 시어머니에게도 할 말을 다 하는 여자다. 희생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엄마도 한 번쯤은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 싶다” 선언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의대에 다니다가 뜻하지 않게 임신했다. 20년 넘게 가정주부로 살았다. 동기들이 교수로, 개업의로 잘 나갈 때 살림의 여왕, 제사의 달인이 됐다. 생사의 고비에서 살아난 후 현모양처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늦은 나이에 가정의학과 레지던트 1년 차로 복귀해 좌충우돌하면서도 결국 개인 병원을 차리는 결말까지, 판타지를 섞은 40대 여성의 경력 복귀·성장 서사에 배우들의 코믹한 열연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넷플릭스, 티빙, U+모바일TV,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감상 가능.

결혼 2년 차, 남편이 달라졌다: ‘며느라기’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 ⓒ카카오TV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 ⓒ카카오TV

시할아버지 제사를 준비하는 여자에게 남편이 말한다. “먼저 하고 있어. 내가 빨리 가서 도와줄게.” 여자는 대꾸한다. “나는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거든. 내가 너를 돕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결혼 생활 2년 차, 남편이 달라졌다. 임신한 아내에겐 “제사 준비는 내가 다 할게. 자기는 내 옆에서 조금만 도와줘”라고 한다. 아내가 며느리 노릇을 못 한다며 야단치는 시어른에겐 이렇게 쏘아붙인다. “세상에 며느리 도리라는 게 따로 어딨어요? 그렇게 따지면 자식 도리 제대로 못 한 우리가 잘못한 거지.”

카카오TV 웹드라마 ‘며느라기’(시즌 1·2)는 여성의 험난한 ‘시월드’ 입성기와 맞벌이 부부의 고충을 세세하게 재현한다. 수신지 작가의 인기 웹툰이 원작이다. “이혼·비혼 조장 드라마”, “결혼하고 싶을 때 보세요”라는 평이 지배적인데, 시즌 2부터는 가부장적 인식을 반성하고 조금씩 성평등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남성과 주변인들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왓챠에서 감상 가능.

어머니들도 ‘이름’이 있다: ‘큰엄마의 미친봉고’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 스틸. ⓒ백그림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 스틸. ⓒ백그림

돌이켜 보면 여성 친척들의 이름을 불러 본 적도, 특별히 떠올려 볼 일도 없었다. 영화 ‘큰엄마의 미친봉고’(감독 백승환)가 예리하게 짚은 지점이다.

‘명절파업’을 소재로 한 아기자기한 코미디 영화다. 가부장적인 유씨 가족의 맏며느리로 40여 년간 묵묵히 제사상을 차려 온 영희(정영주)가 중심인물이다. 온 가족이 모였지만 늘 그렇듯 며느리들만 일하는 명절, 더 참지 못한 영희는 집안 며느리들을 모두 봉고차에 태우고 떠난다. SNS상 화제의 사연을 토대로 각색했다. 일하는 여자들 옆에서 손도 까딱 않던 남자들의 변화라는 해피엔딩은 다소 작위적이지만, 누구나 공감하며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다. 특히 우리 어머니들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메시지에 주목할 만하다. 티빙, 웨이브, 왓챠, U+모바일TV,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감상 가능.

‘부부는 하나’라는 환상, 영화 ‘잠’

영화 ‘잠’ 스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잠’ 스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남편이 잠들기만 하면 딴사람이 된다. 영화 ‘잠’은 수면 이상증세를 겪으며 온갖 기행과 폭력을 일삼는 남편 현수(이선균),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아내 수진(정유미)의 이야기다. 이들의 가훈인 ‘부부는 무엇이든 함께 극복해야 한다’는 무슨 짓을 해서든 가족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여자의 주문이 된다.

이상하다. 여자는 왜 그토록 남편에게 집착하는가. 영화는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한 늙은 남자’,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여자를 가지려는 남자’라는 케케묵은 남성상을 공포의 요소로 활용한다. 그러나 ‘남자에게 얽매이지 않을 권리를 지닌 여자’,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여자’라는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가족’은 일종의 고정 변수다. 그게 참 이상해서 오히려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다. 유해 작가의 본지 리뷰(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0834)처럼, “어쩌면 영화가 공포의 근원으로 지목한 층간소음, 산후정신증, 오컬트적 요소보다 더 두려운 것, 여성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바로 그 믿음일지도 모른다.” 극장 상영 중.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