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태조사 연구비 대폭 축소…질적 조사 폐지
영진위 “유사 연구와 겹쳐 예산 배분 줄인 것”
여성 영화인 4명 중 3명 ‘현장서 성폭력 경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성폭력 의혹으로 사퇴
성평등센터 “현장 상황 파악할 수 있도록 예산 필요”

2018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에서 원민경(오른쪽 두 번째) 변호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2018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에서 원민경(오른쪽 두 번째) 변호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영화계 종사자들의 성폭력 피해 현황을 조사하는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연구비가 직전 조사 대비 절반 이상 축소됐다. 인터뷰 등 심층 조사는 전면 중단됐다. 여성 영화인 4명 중 3명이 현장에서 성폭력을 경험했고, ‘영화계 미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현장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실태조사는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성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10월경 조사를 시작해 내년에 발표될 예정인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의 연구비가 약 3000만원으로 책정됐다. 6000만원이었던 2020년 대비 절반 이상 줄었다. 이에 따라 온라인 설문지를 통한 양적 조사만 진행하고 조사 설계와 대면 심층조사는 중단한다.

예산을 책정하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코로나19로 인한 이번 예산 삭감에 대해 영화산업 축소로 영화진흥위원회 운영에 쓰이는 ‘영화발전기금’이 대폭 축소됐고, 영화산업 활성화에 예산을 투자하기로 결정하면서 연구 예산을 양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영화인 근로환경 조사·성폭력 피해 사례집 등 유사 사업이 있고, 기존 연구들로 인해 표본이 어느 정도 수집됐다고 판단해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예산을 줄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사 연구를 담당하는 한국영화성평등센터(든든)는 영진위가 언급한 유사 사업들과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며, 영화계에 큰 타격을 입힌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후 시행하는 첫 조사인 만큼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성평등센터 측은 “사례집은 성폭력 예방교육에 쓰기 위해 피해자의 상황을 듣고 교육용으로 각색한다. 반면 실태조사는 비밀 유지를 전제로 영화계의 전반적이고 구체적인 성폭력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두 조사는 목적과 결과에 있어서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근로환경 조사나 기타 성평등 사업도 실태조사와는 다른 차원의 연구다. 코로나 기간 동안 달라진 현장 상황을 파악하려면 대면 인터뷰를 통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유사 사업들을 이유로 예산을 축소한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고 유감을 표했다.

계속되는 영화계 성폭력… "현장 파악 위해 심층조사 필요"

2017년 8월 8일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열린 '김기덕 감독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현장. ⓒ뉴시스·여성신문
2017년 8월 8일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열린 '김기덕 감독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현장. ⓒ뉴시스·여성신문

영화계는 위계와 네트워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으로,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많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낙인과 2차 피해, 경력단절을 우려해 입을 열지 못해 왔다.

그러다 2016년 피해자들이 성폭력 경험을 공론화하는 ‘미투’ 운동으로 감독, 배우, 스탭을 불문하고 유명 영화인들이 성희롱·성폭력을 저질러온 것이 알려지면서 영화계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투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2018년에는 성폭력 논란으로 상영을 못하게 된 영화가 너무 많아 업계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이에 영진위와 한국여성영화인모임은 2017년부터 3년 주기로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다음해 결과를 발표했다. 2021년 발표된 실태조사에서는 여성 영화인 4명 중 3명(74.6%)가 성희롱·성폭력을 경험했고, 2명 중 1명은 사건 당시 참고 넘어간다고 답했다.

지난 5월에는 허문영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직원들에게 부적절한 성적 발언을 하거나, 억지로 껴안는 등의 행위를 해왔다는 폭로가 나와 사퇴하는 등 영화계 성폭력 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성평등센터 관계자는 “국내에서 미투 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 중 하나가 영화계다.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업계인 만큼 꾸준하고 치밀한 관찰이 필요하다”며 “단답식 문항만 진행하라는 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박탈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서는 심층조사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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