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개막...5개국 7인(팀) 작품 15점 전시
브루스 나우만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거꾸로 움직이기’
강서경 ‘자리’ 연작 등 국내 최초 공개

차이밍량, 행자 行者 Walker, 2012,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6분 16초. ⓒCourtesy of Hong Kong International Film Festival/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차이밍량, 행자 行者 Walker, 2012,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6분 16초. ⓒCourtesy of Hong Kong International Film Festival/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붉은 법의를 입은 남자가 홍콩 침사추이 한복판을 느리게 걷는다. 분주한 한낮의 도심에서 그만 홀로 유유하다. 대만 예술영화 거장 차이밍량(Tsai Ming-liang)의 ‘행자(行者, Walker, 2012)’는 “극도의 느림의 미학”을 그린다. 퍼포먼스임을 눈치채고 모여서 남자를 지켜보는 행인들, 그러거나 말거나 바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익숙한 우리를 본다.

이번엔 다섯 댄서가 빠른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남성들은 힐을 신고 어깨에 긴 머리 가발을 붙였다. 자세히 보면 거꾸로 재생된 듯한 사운드, 순간적으로 어색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베를린 기반 듀오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Pauline Boudry/Renate Lorenz)의 영상설치작 ‘거꾸로 움직이기(Moving Backwards)’다. 2019년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스위스관 대표작이다. 댄스 플로어와 조명이 설치된 전시장은 그 자체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하나의 작품이다.

폴린 부드리 레나테 로렌츠, 거꾸로 움직이기 Moving Backwards, 2019, 복합 매체 설치; 싱글채널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23분, LED 조명, 댄스플로어, 텍스트. ⓒCourtesy of Ellen de Bruijne Projects Amsterdam and Marcelle Alix Paris/코리아나미술관 제공
폴린 부드리 레나테 로렌츠, 거꾸로 움직이기 Moving Backwards, 2019, 복합 매체 설치; 싱글채널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23분, LED 조명, 댄스플로어, 텍스트. ⓒCourtesy of Ellen de Bruijne Projects Amsterdam and Marcelle Alix Paris/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코리아나미술관(관장 유상옥·유승희)은 국제기획전 ‘Step X Step’을 오는 14일부터 11월30일까지 연다. ‘걷기’라는 일상적 행위를 사회적·안무적 몸짓으로 해석한 5개국 현대미술가 7인(팀)의 작품 15점을 모았다. ‘거꾸로 움직이기’를 포함해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도 다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S라인’을 강조하는 과장된 태도로 걷는 남자가 보인다. 타임지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된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초기 스튜디오 실험 영상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1968)이다.

브루스 나우만,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 Walk with Contrapposto, 1968, 싱글채널 비디오, 흑백, 사운드, 60분. Courtesy of Electronic Arts Intermix (EAI), New York. ⓒBruce Nauman / Artist Rights Society(ARS), New York SACK, Seoul, 2023
브루스 나우만,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 Walk with Contrapposto, 1968, 싱글채널 비디오, 흑백, 사운드, 60분. Courtesy of Electronic Arts Intermix (EAI), New York. ⓒBruce Nauman / Artist Rights Society(ARS), New York SACK, Seoul, 2023

나우만은 서양 조각상의 전형적인 자세처럼 두 손을 깍지 껴 목덜미에 대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좁은 복도를 힘겹게 오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했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일어나는 건 모두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완결된 오브제(object)가 아닌 자기 신체를 이용한 ‘행위(activity)로서의 예술’을 탐구하고 기록했다. 당대 안무가와 시각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같은 작가의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1967-68)까지,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강서경, 자리 검은 자리—동—cccktps Mat Black Mat—Act—cccktps, 2021-2022, 린넨 또는 직물에 자수, Centre for Heritage, Arts and Textile 제작지원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강서경, 자리 검은 자리—동—cccktps Mat Black Mat—Act—cccktps, 2021-2022, 린넨 또는 직물에 자수, Centre for Heritage, Arts and Textile 제작지원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 강서경의 ‘자리’ 연작도 한국 최초로 공개된다. 작가는 2021년 홍콩 초등학생들과 함께 개개인의 서사를 움직임이 담긴 이미지로 표현하는 워크숍을 열었는데, 그 결과물을 기반으로 만든 자수 작품 7점(‘자리 검은 자리 — 동 — cccktps’ 연작)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전통에서 찾은 개념과 미학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재해석해 왔다. 정갈한 수직, 수평의 그리드(grid)를 넘나드는 이미지가 자유롭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누워서 걷는 여자도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되기도 한 에브리 오션 휴즈(Every Ocean Hughes)의 2채널 영상 설치작 ‘Sense and Sense’(2010)다. 스톡홀름 세르겔 광장에서 인간의 직립보행이 지니는 수직성에 반하여 땅과 수평을 이루는 수평적 걷기를 시도한다.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한밤의 맨해튼에서 ‘문워크’는 어떤가. 스웨덴 작가 클라라 리덴(Klara Lidén)은 문워크, 도심 속을 걷고 넘어지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한 영상 작품 2점을 선보인다.

에브리 오션 휴즈, 감각과 지각 Sense and Sense, 2010, 나무로 제작된 스크린에 2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무음, 15분 25초.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에브리 오션 휴즈, 감각과 지각 Sense and Sense, 2010, 나무로 제작된 스크린에 2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무음, 15분 25초.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코리아나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국제기획전 ‘Step X Step’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코리아나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국제기획전 ‘Step X Step’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신제현, MP3 댄스-스텝 MP3 Dance-Step, 2023, 4채널 비디오와 1 개의 라이브 카메라, 모니터 설치, 컬러, 사운드, 7분 15초, 코리아나미술관 제작지원.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신제현, MP3 댄스-스텝 MP3 Dance-Step, 2023, 4채널 비디오와 1 개의 라이브 카메라, 모니터 설치, 컬러, 사운드, 7분 15초, 코리아나미술관 제작지원.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신제현 작가는 코리아나미술관의 제작 지원을 받아 관객 참여형 신작 ‘MP3 댄스-스텝’을 선보인다. 작가는 춘앵무, 발레, 검무, 태권도 퍼포머에게 녹음된 지시어대로 움직여 달라고 요청했다. 개개인의 걸음과 움직임의 차이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관객이 직접 부스에 들어가서 녹음된 지시어에 따라 퍼포먼스를 해볼 수 있다.

서지은 책임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작품들 위주로 구성했다. 뻔하지 않은, 생각을 자극하는 전시다. 『걷기의 인문학』의 저자 리베카 솔닛의 언급처럼 ‘걷기라는 행위가 얼마나 창조적이며 동시에 혁명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강서경 작가와 미술관이 함께 마련한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나의 스텝, 우리의 춤’으로, 강 작가 연작의 주요 요소인 ‘정간보’를 활용한 종이 위에 관객이 상상한 스텝과 움직임을 그려볼 수 있다. 관련 도서와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아카이브존도 마련했다. 연계 프로그램으로 10월12일 이한범 미술평론가의 토크, 11월2일 서지은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의 토크가 열릴 예정이다. 11월 중에는 안무가 송주원과 함께 전시장 안에서 걷기를 수행하는 관객 참여 퍼포먼스 ‘걷는 몸’이 진행될 예정이다.

유승희 관장 “지속가능하고 분명한 개성 지닌 미술관으로”

코리아나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전시다. 유승희 관장은 12일 기자간담회에서 “지속가능한 미술관”, “분명한 개성을 지닌 미술관”으로 거듭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국내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고 있고 애호가들도 늘었다. 2003년 개관할 때 압구정 일대에 문화공간은 코리아나미술관뿐이었는데 이젠 여러 공간이 들어섰다. 이런 시대에 미술관의 역할은 뭘까 고민한다. 저희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치, 신체, 여성 등을 주제로 꾸준히 특색 있는 전시를 열어 왔다. 많은 이들과 예술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성실하고 신중하게 매번 좋은 전시를 보여주는 게 저희가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 

전시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미술관 홈페이지(www.spacec.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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