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취약계층 돌봄 등
필수서비스 외 지출 금지
2012년 ‘임금 성차별’ 소송 패소 후
“여성 노동자들 손해배상 재원 부족”

ⓒPixabay
ⓒPixabay

영국 버밍엄시가 5일(현지시간) 사실상 파산을 선언했다. BBC, 가디언지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버밍엄 시의회는 이날 지방정부재정법에 따라 의료나 취약계층 돌봄 등 필수 서비스 외 모든 지출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임금 성차별’이 화근이 됐다. 버밍엄시는 소속 여성 노동자들에게 남성보다 돈을 적게 준 데 대해 수조원대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재원이 없다며 파산 선언을 한 것이다. 인구 약 115만명,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파산 소식에 영국 사회는 술렁이고 있다. 유사한 임금 성차별 문제로 소송이나 자체 조사 중인 지자체가 수십 곳에 달한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영국 버밍엄시 버밍엄 시의회 청사 전경. ⓒWikimedia Commons
영국 버밍엄시 버밍엄 시의회 청사 전경. ⓒWikimedia Commons

지난 2012년, 버밍엄시 소속 노동자 174명(여성 170명)은 시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성차별’ 소송에서 승리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여성 직군’인 청소, 급식, 교육 보조, 돌봄 등 업무를 맡았거나 퇴직한 노동자들이다. 시가 ‘남성 직군’인 환경미화원, 무덤지기 등에만 보너스를 지급했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쓰레기 수거 일을 하는 남성이 1년에 5만 1000파운드(약 8521만원)를 벌 때, 기본 급여만 받은 여성은 고작 1만2000파운드(약 2000만원)를 벌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법원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영국 노동조합들은 ‘기념비적 판결’이라며 환영했다.

버밍엄 시의회는 승소한 노동자들, 비슷한 처지의 다른 노동자 수백 명의 몫까지 합해 지난 10여 년간 약 11억 파운드(약 1조 8400억원)을 차별 시정 임금으로 지불했고, 이 과정에서 국립전시센터 등 자산도 매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최대 약 7억 6000만 파운드(약 1조 3000억원)를 지불해야 하는데, 재원이 부족해서 사실상 파산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시의회의 설명이다. 또 이 문제로 매월 5백만~1400만 파운드(약 83억6300만원~2341억 6800만원) 비율로 꾸준히 부채가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시의회는 올해 예산 32억 파운드(약 5조 4000억원) 중 8700만 파운드(1459억원)가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새 IT 시스템 도입 비용, 물가 상승, 사회복지 수요 증가, 법인세 세수 감소, 보수당 정부의 지방정부 예산 삭감 기조 등도 재정난을 불렀다고 밝혔다. 노동당이 집권한 시의회는 “버밍엄은 역대 보수당 정부에 의해 10억 파운드를 빼앗겼다”고 밝혔다.

영국에서는 이렇게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자체가 파산 선언을 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들 지자체는 예산을 수정해 서비스 지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거리 청소, 공원 등 공공시설 유지·관리, 여가, 사회적 돌봄 영역을 제외한 아동 서비스, 도서관 등 관련 예산이 삭감될 위기에 놓였다.

영국 여성단체 포싯 소사이어티는 ‘동일임금은 선택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버밍엄 시의회가 이런 엄청난 책임을 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며 “처음부터 여성 직원들의 가치를 적절히 평가하고 보수를 지급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여성들은 보육원, 사회복지 등 공공 서비스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예산 삭감 조처는 버밍엄시의 여성들에게 부당한 처벌과도 같다”고 비판했다.

영국 여성단체 포싯 소사이어티는 5일 공식 SNS 채널을 통해 “(버밍엄 시의회의) 이번 예산 삭감 조처는 버밍엄시의 여성들에게 부당한 처벌과도 같다”고 비판했다. ⓒ포싯 소사이어티 트윗 캡처
영국 여성단체 포싯 소사이어티는 5일 공식 SNS 채널을 통해 “(버밍엄 시의회의) 이번 예산 삭감 조처는 버밍엄시의 여성들에게 부당한 처벌과도 같다”고 비판했다. ⓒ포싯 소사이어티 트윗 캡처

버밍엄 시의회의 리더 존 코튼은 “지방정부는 완전히 폭풍에 직면했다”면서도 시민들을 위한 필수 서비스는 계속 제공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편 유사한 임금 성차별 소송이나 비판에 직면한 영국 지자체는 한둘이 아니다. 영국 3대 노동조합 중 하나인 GMB에 따르면 코번트리, 던디 등 지자체 20여 곳이 관련 문제로 소송 중이거나 시의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

레아 울프슨 GMB 내부 및 노사 관계 책임자는 가디언지에 “다른 많은 시의회들이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며 더 많은 지자체가 여성들에게 배상금을 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이 배상금은 여성들에게 공짜로 주는 돈이 아니라 (여성들이) 매 순간 도둑맞는 돈”이라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