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파수꾼의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제가 아이히만인 건 맞지만 저 말고도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습니다. 내가 안 했다면 내 자리에서 다른 관료가 했을 거예요.”(아돌프 아이히만)

“죄책감을 없애는 방법은 이미 결정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결정하거나, 운명이 결정했다고 정당화하죠. 결국, 이런 식으로 죄책감의 무게를 덜어내는 거죠, 바로 당신처럼.”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 아렌트와 아이히만은 직접 말을 주고 받은 일이 없다. 유대인 대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아르헨티나로 도주해서 잠적해 있다가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고 그 다음 해에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아렌트는 예루살렘으로 가 재판을 참관하고 보고서를 작성해서 1963년에 미국 잡지 『뉴요커』를 통해 기사로 내보낸다. 이어 1965년에 그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책으로 세상에 나온다. 

아렌트 역은 차유경, 아이히만 역은 김수현 배우. ⓒ 극단 파수꾼
아렌트 역은 차유경, 아이히만 역은 김수현 배우. ⓒ 극단 파수꾼

그 문제적 책에서 아렌트는 객관적인 관찰자이며 기록자였다. 아이히만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 같은 것은 담겨있지 않다. 그런데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에 등장한 아렌트는 전혀 다르다. 책상 위에 타자기를 놓고 아이히만을 취조하는 아렌트는 “승진을 위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뻔뻔한 학살자에게 격분한다.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히만을 향해 서류 다발을 던지며 외친다.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었는데 서명 하나로 모든 걸 결정했잖아요. 무슨 영화를 얻겠다고 15만 명의 유대인들을 떠나게 만든 거죠?” 그가 가스실에서의 대학살을 ‘최종해결책’이라고 표현하자 아렌트는 화를 낸다. “최종해결책. 이 최악의 비극이 아니었다면 이 말장난이 재밌을지도 모르겠어요. 본인이 계획하고 관리하며 조직한 대량학살을, 아이히만은 원치 않았다니. 너무 우스꽝스럽잖아요.”

한나 아렌트는 줄담배를 피는 ‘골초’로 유명했다. ⓒ 극단 파수꾼
한나 아렌트는 줄담배를 피는 ‘골초’로 유명했다. ⓒ 극단 파수꾼

두산아트센터에서 8월 6일까지 공연 중인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는 지난해 산울림 소극장에서도 공연했던 작품이다. 이은준 연출에 차유경이 아렌트, 김수현이 아이히만 역을 맡은 것은 그대로인데, 넓어진 무대는 극의 여러 효과를 높여준다. 연극은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뼈대로 한 것이지만, 이탈리아 극작가 스테파노 마시니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마시니의 희곡은 아렌트의 저작과 구성과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창작물이다. 그러니 연극을 관람할 때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기억일랑 접어두고 오롯이 마시니의 극에만 집중하는 것이 낫다.

30여년의 연기생활을 거쳐 이제 역사의 무게를 소화해내는 연기의 경지에 도달한 차유경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연극 아이히만은 볼만하다. 그 난해한 대사들을 순간의 막힘도 없이, 담겨진 의미대로의 표정을 지어가며 연기하는 차유경을 보노라면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아이히만 역을 맡은 김수현도 “그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는 뺀질뺀질하고 비겁한 인간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분노에 찬 얼굴로 아이히만을 공박하는 아렌트의 모습은 악이 심판 당하는 것을 보고싶어 하는 관객들의 정의로운 욕구에 부합한다. 그래서 연극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의 재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관객에게도 연극 자체로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다.

ⓒ 극단 파수꾼
ⓒ 극단 파수꾼

다만 아렌트의 보고서는 태생적으로 논쟁적이었고, 이 연극에서 표현된 아렌트의 모습 또한 논쟁적일 수 있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세 가지 무능력을 말한다. ‘말하는데 무능력함’,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타인의 입장에서 무능력함’이 그것이다.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다. 익히 알려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책이 발간되자 ‘악의 평범성’은 아이히만을 사실상 용서해준 것이라는 비판이 사방에서 제기된다. “아이히만은 사형을 면하기 위해 혼신의 연기를 다했는데, 아렌트를 속이는 데는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아이히만이나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악의 평범성’으로 가버렸다.” (베티아 스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스탕네트는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숨어있을 때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책을 통해 아이히만이 확고한 반유대주의자였고 자신의 행동이 낳을 결과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며 아렌트를 반박한다. 아르헨티나로 도피한 이후에도 아이히만은 "천만여 명의 적이 죽었다면, 우리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는 확신범이었다는 것이 스탕네트의 설명이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판과 원성이 자자했다. 아렌트의 많은 동료들이 그녀와의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용서했다는 해석은 오독에 가깝다. “내가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살인자는 아니에요" 하고 말할 때 그 말은, 그가 그런 살인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내가 뜻하는 바는 그가 끝없이 악한 존재라는 거예요. 우리가 '범죄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에요.”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지식인이었고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정의는 훼손됐던 질서를 회복해야 해요. 이건 질서를 훼손한 당사자들이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아야지만 성공하는 치유 과정이죠.” (『한나 아렌트의 말』) 아렌트는 독일인들이 자신들 가운데 살인자를 두고서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유대인의 명예와 품위에 반하는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아렌트에 대한 오해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에서 기인한다. 아렌트는 후일 인터뷰를 통해 ‘평범성’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나는 내가 누군가를 꾸짖으면 그들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너무 평범해. 진부하다"라고 말해요. 아니면 "별로 안 좋아" 하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던 뜻이에요.” 그러니까 ‘banality’는 책임을 회피하는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이 식상하고 진부하다는 의미였지, 그의 범죄가 평범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지난해 산울림 소극장에서의 공연 ⓒ 극단 파수꾼
지난해 산울림 소극장에서의 공연 ⓒ 극단 파수꾼

또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스테파노 마시니의 희곡에 기초한 이 연극을 보다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어,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기록하면서 분노하지 않았던 냉철한 학자였는데, 그렇다면 이 연극은 아렌트의 생각에서 이탈한 것인가. 굳이 설명하자면 마시니는 아이히만의 행위가 낳은 결과에 대한 분노를 극으로 표현했다. 반면 아렌트는 정치철학자로서 그런 악의 행위를 낳은 뿌리가 무엇이었는지, 아이히만 같은 인간이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에 대한 본질을 천착한 것이다. 그러니 아렌트의 책과 마시니의 극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다. 

만약 당신이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봤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는가. 마시니의 극에 등장하는 아렌트처럼 아이히만을 향해 서류 뭉치를 던져가며 분노하겠는가, 아니면 냉정한 보고서를 기록한 아렌트처럼 근원적인 성찰의 질문을 던지고 있겠는가. 아마도 현실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하는 아렌트의 모습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것이 인간 본성에 자리한 정의와 상식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심연으로 다가가려는 아렌트의 모습은 그것대로 귀한 가치를 갖는다. 분노는 종종 특정 개인을 향한 것이 되지만, 성찰의 질문은 우리 모두를 일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이히만 개인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연극에서 차유경은 아렌트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한다. “용기는 영혼의 빛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냈을 때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거죠. 존엄성은 인간의 일부고 누구나 가져야 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어떻게 할 때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게 되는 가에 대한 얘기이다. 그러니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는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같은 뿌리, 다른 표현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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