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읽기]
유약·비겁한 남성성 그리기에 동원된
아들에 집착하는 ‘불완전한 모성’
인간에 대한 이해나 존중보다
낙인과 책임 전가 아쉬워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아리 애스터의 신작은 주인공 보가 ‘무서워한다’는 사실만 알리고,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리지 않음으로써 제목부터 수수께끼를 자처한다. 편집증 환자인 보가 진정 피하고 싶은 건 세상의 불결하고 성적인 위협일 수도,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주려는 어머니의 집착일 수도 있다. 답을 내리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이다. 부유한 유대인 홀어머니가 외아들을 과보호하여 인생을 망쳤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2시간 넘게 전개되다가도, 결국 유약한 외아들이 자기의 죄까지 남에게 떠넘기려 하는 비겁한 성인에 불과하단 사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아리 애스터는 ‘정상 가족과 모성성은 당연하지 않다’는 아주 단순한 주장을 하는 드문 백인 남성 감독으로서 큰 기대를 받아왔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거침없이 가족의 뼈와 살을 해체하는 호러 장르였고, 자식은 응당 부모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가족주의적 의무론에 치를 떠는 이들은 그에 호응해왔다. 전작들과 궤를 같이 하는 이번 영화 역시 완벽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받는 모성이 사실 완벽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모성의 필요조건이라면, 아리 애스터가 그리는 어머니들은 자식이 사랑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점에서 이미 부적합하고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그런데 아리 애스터가 이번 작품에서 ‘실패한 어머니’에 대해 취한 태도는 놀랍게도 이해나 연민이 아니라 관음과 이용에 가깝다. ‘유전’의 어머니 애니는 이피게네이아 신화의 전복을 통해 최소한의 주체성을 확보했지만,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어머니 모나는 아들을 고통받게 하는 사람으로서만 서사적 필연성을 갖기 때문이다.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에서 보는 끊임없이 물을 갈망하거나 그리워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이는 곧 불편한 모성애에 대해 자식이 갖는 양가적 감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머니(la mère)와 바다(la mer)의 동일시는 누벨바그 시대 ‘400번의 구타’(1959)부터 반복되어 그리 참신한 기법으론 볼 수 없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며 평생 미숙한 소년에 머무른 남자의 (다소 뻔뻔하고 진부한) 고충. 영화가 온갖 상징과 레퍼런스를 동원해 공들여 설명하는 것은 딱 ‘아들의 고충’까지다. 영화가 정말로 설명했어야 하지만 결국 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아들에게 집착하는지다.

물론 아리 애스터는 여성 숭배에 근간을 두는 척하는 모성 신화가 본질적으로 여성에 대한 타자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장편에서 아버지는 종마이자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어머니는 ‘마음만 먹으면’ 혹은 ‘삐끗하면’ 가족을 송두리째 부술 힘을 가진 실세로 재발명된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모나의 행동과 동기를 구축하고 모나를 두려워 하는 보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보를 먼저 창조하고 그가 두려워할 만한 어머니를 사후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모나의 이상한 모성애는 보의 편집증적 공포의 정당성을 위해 선험적으로 존재하기에 그 뿌리에 대한 내러티브가 전혀 준비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자연 발생한’ 그 모성은 결국 아리 애스터가 최초에 지적했던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한 척하는’ 모성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게다가 모나는 성녀화를 거부하는 체하며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보에게 호의를 갖고 접근하는 다른 여자들에 대한 공격적인 견제를 보이기도 한다. 아들의 유일무이한 사랑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아들을 성애적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는 순결한 어머니로 남고 싶은 양가적 욕구를 지닌 여자. 이 관능적인 홀어머니에 대한 낡고 뒤떨어진 이미지는 그 자체로 여성혐오다.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화룡점정으로 ‘트루먼 쇼’를 방불케 하는 결말에서는 보의 과거가 뒤늦게 밝혀지며 일방적 피해자인 것만 같았던 보가 어머니란 여성을 남몰래 모욕한 사건이 소개된다. 그에겐 청소년기에 다른 소년들 앞에서 과시하기 위해 어머니의 빨지 않은 속옷을 보여주고 훔쳐가게 한 전과가 있던 것이다. 추악한 남성성에서 비롯된 죄와, 사소하지만 모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의도적으로 혼재되기 때문에 관객은 피가해 구도를 판별하기 더더욱 어려워진다.

아리 애스터는 바로 그런 뒤틀림이 가족의 불가피한 숙명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아들에게 집착하는 여성과 어머니를 모태부터 밀어냈던 아들 중 어느 쪽이 더 풍부한 서사를 부여받고 카메라의 주된 시점을 점유했는가. 극적 효과를 위해서라지만 마지막 30분이 되어서야 겨우 등장한 모나가 객관적 변론을 받을 기회는 없었으며, 그의 역할은 이입 가능한 주연(protagonist)이 아니라 아들의 적대자(antagonist)로 이미 고정돼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모성을 원망하지 않는 체하지만 잔혹동화처럼 과장하고,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붕괴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깊은 이해나 존중의 시도가 엿보이지 않는 극화는 또다른 낙인과 책임 전가에 불과할 뿐이다. 아리 애스터의 모성 실험은 어쩐지 점점 더 ‘어머니’ 그 자체를 탐구하기보단 ‘어머니의 아들’의 상처를 핥아주는 방식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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