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이미지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이미지

안전망을 잊은 게 죄는 아니지요.
이러고 끝이라고요?

혼자 곱씹다 이불킥하는 정도를 넘어 아는 사람 없어도 생각할수록 수치심이 올라와 두고두고 화가 치미는 일이 있고 심하게는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범법자로서의 법 처벌이 마음 편한 경우도 있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랙 분)가 보여주는 선량한 인간의 복잡한 표정이 관객을 끌고 가는 이유다. 영화의 제목이면서 미국 매사츄세츠 주에 실재하는 작은 도시 맨체스터바이더씨(Manchester-by-the-Sea)는 ‘갯마을’ 정도이니 특별하지 않으나 그래서 문득 보편성과 함께 무수히 지나치는 사소함을 돌아보게 한다.

보스턴에서 건물 관리 일을 하며 홀로 사는 리는 형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늘 그랬듯이 조카를 돌보기 위해 차를 몰고 간다. 형 조셉이 운전하는 배 위에서 11살 조카 패트릭과 장난스레 나누는 회상 속의 대화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평화, ‘순수한 행복’의 기억이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느닷없는 불행은 무심하게 펼쳐진 바다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게 보이니 인간과 세계 사이의 부조리로나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사소한 허술함의 치명적 결과

“목성은 안 보여, 바보야.” 랜디(미셸 윌리암스 분)의 대사는 쉽게 깨닫기 어려운 복선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게 목성이건 달이건 대충 알거나 말해도 그것이 우리 삶에 유해한 결과를 낳진 않는다. 그러나 벽난로의 불을 지피고 안전망 설치를 잊은 채 새벽 두 시에 취한 몸으로 걸어서 20분 걸리는 곳으로 술을 사러 가는 행위는 명백히 유해하다. 의도와 소망이 정당하다 해서 자연 혹은 세계가 의식의 허술함을 감싸주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트 봉지를 안고 있는 리의 모습은 상황에 대한 ‘항의와 수치심’의 모순을 표현한다. 집이 불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갈 때, 소방대원이 아이들의 시신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주저앉았다 일어설 때 리가 안고 있는 마트 봉지(젖먹이 아들의 기저귀가 들어 있는)는 관객을 의아하게 한다. 경찰서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봉지 아래쪽 보이지 않는 곳에 맥주가 들어 있을 이 절묘한 장치는 그저 순수한 행복을 추구했을 뿐인 상황에서 발생한 치명적 결과에 항의하면서 동시에 리의 심연에 자리 잡게 될 깊은 수치심을 설명한다.

음주 운전으로 숱한 인명이 느닷없이 희생되고 간접흡연으로 인해 비흡연자가 어이없이 죽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살인’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의 결함이 자신 혹은 타인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일은 흔하다. 따라서 변명하지 못하고 경찰의 총을 집어 든 리에게 동네 사람들(선한 관객)은 침묵한다. 그래서 인간은 선한(소박한)만큼 악해져야(철저해져야) 하는 걸까.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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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속도

형 조셉(카일 챈들러 분)이 조카의 후견인으로 삼촌인 자신을 지정해놨다는 것을 알게 된 리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형이 남긴 배를 정리하고 법적 성인이 될 때까지 16세인 패트릭을 맡아줄 사람을 물색하는 과정은 리가 자신의 고통을 조카에게 전이시키지 않으려는 명징한 사고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패트릭은 심부전증으로 자주 입원해왔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큰 충격 없이 담담한 일상생활을 하고 리는 그곳에서 계속 살고 싶어하는 패트릭을 위해 일을 처리하면서도 후견인 역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은 극적 사건도 없이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 불쑥불쑥 끼어드는 리의 회상을 통해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혼자만의 고통이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일어설 방법을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치유를 향한 현실적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후견인 지정은 아들에게 자신을 대신할 최고의 아버지는 삼촌 리임을 알고 있는 조셉이 치유의 방법으로 남긴 굳건한 신뢰와 사랑이다. 이 ‘위대한 유산’은 리와 패트릭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 속에서 받아들여지고 힘을 발휘할 가능성을 본다.

자신의 실수로 난 화재로 세 남매를 죽게 한 아버지라는 꼬리표는 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따라다닌다. 또한 범죄가 아닌 실수로 판명되자 충동적으로 경찰의 권총을 뽑아 자기 머리를 겨눈 일은 리에 대한 주변인들의 연민과 동정을 얻었을 것이나 전작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동굴(작고 높은 창이 있는 감옥 같은 방)같은 곳에서 생활한다. 이후 패트릭을 돌보기 위해 마을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하지만 수치스런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리가 크게 다친 모습을 본 패트릭은 그제야 조카가 아닌 성인으로서 삼촌의 방에 들어서고 가지런히 놓인 세 아이의 사진을 발견, 한참 응시한다. 삼촌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패트릭의 ‘성장’ 지점이며 리에게는 ‘살아있는 딸들’의 꿈, 즉 ‘자기 용서’로 ‘생존’하는 지점이다.

눈이 녹은 바닷가 풍경의 미장센과 함께 패트릭은 삼촌을 보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아버지의 매장을 결정한다. 리는 조셉이 남긴 엽총 네 자루를 팔아 배의 모터를 사고 패트릭이 원하는 삶을 준비하면서도 결정은 패트릭의 몫으로 남김으로써 아버지 역할을 완성한다. 경찰서에서 자신을 죽이는 데 사용할 뻔했던 ‘총’이 패트릭의 삶을 준비하고 자신의 삶을 부활시키는 도구가 된 것이다. “아빠, 우리 타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리의 의식과 무의식 안에서 24시간 죽어 있던 세 남매가 살아있는 딸이 되어 생시처럼 선명하게 말하는 대사는 고통의 기억이 변환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치유의 시작이다. 느리더라도 그 진전은 조카 패트릭에게 온전한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리와 관객들은 알고 있다.

옥의 티, 영화 속 여성들

바다에서 보는 마을, 마을에서 보는 바다는 무심하게 나란히 공존한다. 자연으로 표상되는 거대한 힘의 존재는 사실상 간섭하거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언제나 그곳에 있을 뿐이다. 배 위 앉아 품에 안긴 듯 나란히 바다와 함께 있는 주인공의 평화로운 회상과 고통의 오버랩 자체가 지루한 일상과 닮아 있어서 조금은 관객의 인내를 요한다.

발표된 작품은 독립 인격체와 유사하다. 주연배우의 성추행 스캔들 등은 영화와 분리하고자 하는 게 필자의 고집이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랜디와 엘리스) 모두 착실한 남성과의 재혼으로 새 삶을 이루게 해서 떠나보내는 건 어떤 맥락일까? 이 영화는 절친 제작진, ‘남자들의 이야기’인가? 보편성으로 가려다가 아쉽게 멈춰서는 지점이다.

필자: 문수인 작가. 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현재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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