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벨기에서 정자기증 받아 임신한 레즈비언 김규진 씨
아이 낳고 기르는 해외 동성부부들 보며 용기 얻어
결혼한 부부지만 한국에선 아직 법적으로 ‘한부모’
출산 후 한국 거주 계획… “아이 위해 사회 바꿀 것“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임신 8개월에 접어든 김규진씨.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4년 전 공개적으로 결혼 사실을 알렸던 자칭 ‘유부녀 레즈비언’ 김규진(31)씨가 최근 임신 사실을 공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국내 첫’ 타이틀을 갈아치우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가 주목됨과 동시에 ‘나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보장해야 할 필요성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든 규진 씨를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원래 김규진, 김세연 부부는 임신 계획이 전혀 없었다. 세연 씨는 ‘몸에 안 좋은 건 안 하는 스타일’이고, 규진 씨도 아이를 낳는 것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실제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 동성부부들을 보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봤다.

“저희 부부가 결혼했을 때 응원쪽지를 주셨던,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레즈비언 부부가 있다. 미국에 갈 일이 있어서 그 분들을 한 번 찾아뵀었는데, 너무 귀여운 아기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봤다. 거기서 조금 용기를 얻었다. 그분들이 가끔 한국에 놀러 오시는데, 사람들이 아이를 보고 ‘아빠는 외국인이에요?’ 물어볼 때마다 ‘정자 기증을 받아서 낳았고, 저희는 레즈비언 부부예요’라고 말했을 때, 그렇게까지 대놓고 혐오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더 용기를 얻었던 것도 있다.”

김규진 씨의 가방에 임산부 뱃지가 달려있다.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규진씨의 가방에 임산부 뱃지가 달려있다.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프랑스는 법을 바꿔 2021년부터 비혼여성과 레즈비언 부부에게도 난임 시술을 지원하고 있다. 규진 씨는 지난해 업무 차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파리에서 시술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1년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정자가 동났기’ 때문이다. 합법화되며 시술을 받으려는 레즈비언 부부들이 몰렸을 것이라는 게 현지의 분석이다.

규진 씨는 “추천을 받아 조금 더 빠르게 시술받을 수 있는 벨기에로 가게 됐다. 알고 보니 그곳은 프랑스 레즈비언 부부들이 합법화 이전에 시술을 받던 병원이었다. 고객의 반 이상이 프랑스 레즈비언 부부였다. 그 덕에 물 흐르듯이 모든 과정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그는 “임신 체질”인가 싶을 정도로 임신 자체는 수월했다며 “시험관을 하지 않고, 인공수정을 통해서 한 번 만에 성공했다. 성공 확률이 15%라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임 시술’라고 일컫는 과정은 고통스럽기로 유명하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임신·출산을 경험한 이성애자 친구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그동안 이성애자 친구들이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서 전혀 몰랐는데, 임신 자체가 정말 힘든 거였다. 난임 검사부터 너무 아프고 길다. 몸에 굉장히 부담이 된다는 걸 깨닫고 쉬운 일이 아니구나, 다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국에서 동성부부는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규진 씨의 출산일에도 세연 씨는 ‘배우자 출산휴가’를 쓸 수 없다. 규진 씨는 법적으로 ‘한부모’인 상태다.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규진 씨는 “한국에서 동성부부는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출산일에도 와이프가 ‘배우자 출산휴가’를 쓸 수 없다는 점이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규진 씨는 법적으로 ‘한부모’인 상태다. ⓒ송은지 사진작가·여성신문

그는 프랑스에서 출산휴가를 받고 한국에 들어와 있다. 프랑스의 출산휴가는 한국보다 1개월 더 긴 4개월이다. 산전 1개월, 산후 3개월의 유급휴가를 제공한다. 게다가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출산휴가 기간 중 기존 급여의 100%를 받는다는 게 규진 씨의 설명이다. 3개월에 대략 월 210만원 정도(2023년 기준)로 상한선을 두고 있는 한국과는 비교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큰 걸림돌”이 있다. 한국에서 동성부부는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규진 씨의 출산일에도 세연 씨는 ‘배우자 출산휴가’를 쓸 수 없다. 규진 씨는 법적으로 ‘한부모’인 상태다. 서로를 반려로 여기며 함께 살고, 태어날 아기를 위한 용품을 알아보는 모습은 여느 가족과 다르지 않지만, 한국의 낡은 가족제도 안에서 이들은 ‘가족’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규진 씨는 출산 후 한국으로 복직할 계획이다. 와이프 세연 씨의 직업은 의사로, 국내 면허로는 외국에서 일을 하기 어렵다. 규진 씨는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면서도 “아이가 아무래도 혼혈일테니 ‘아빠는 외국인이냐’는 질문을 매일 받으면 스트레스일 것 같아 걱정은 된다. 그래서 아이가 사회로 나가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변화를 만들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2019년 미국에서 혼인 신고를 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레즈비언 부부인 김규진, 김세연 부부(왼쪽)와 10년 차 게이커플 유튜브 채널 망원댁tv의 킴, 백팩 커플(오른쪽)이 지난 1일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진의 선두에 서서 부케를 던지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2019년 미국에서 혼인 신고를 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레즈비언 부부인 김규진, 김세연 부부(왼쪽)와 10년 차 게이커플 유튜브 채널 망원댁tv의 킴, 백팩 커플(오른쪽)이 지난 1일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진의 선두에 서서 부케를 던지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변화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일에는 만삭의 몸으로 서울 을지로 일대에서 열린 퀴어 축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거기서 규진 씨는 ‘승기’를 느꼈다.

“‘우리 팀’이 이기겠다는 걸 느꼈다. 퀴어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다들 너무 즐거워하고 힘에 차 있었다. 그런데 소위 ‘혐오세력’은 나이도 드시고 전과 달리 힘들어 보였다. 그걸 보고 ‘우리가 이기는 게임이구나’ 생각했다.”

결혼에 이어 임신까지, 사생활을 연달아 대중에 공개하는 것은 분명 부담일 터. ‘운동’과 같은 삶을 지속해 나갈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내가 변화를 만들지 않으면 남들이 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엔 제 삶은 너무 소중하고, 부딪히는 게 성격에도 맞는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쪽이 훨씬 유리하다. 맘카페에 제 (임신 소식) 기사를 공유하며 ‘레즈비언 출산 역겹지 않나요?’라는 혐오적 게시물을 올리는 분이 있었다. 그 게시물에 댓글로 ‘제가 김규진인데, 저도 ‘맘’이라서 (카페에) 들어와 있다. 제가 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말아달라’고 밝히니까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글을 지우더라. 빠른 변화가 일어나는 걸 보면 오히려 힘을 얻는다.”

그는 성소수자로 구성된 부모모임도 만들 생각이다. 성소수자 자녀들을 이해하고 이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기존의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제는 ’성소수자인’ 부모모임도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체를 밝히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대대적인 얼굴이 돼서 같이 모여서 대화 나누면서 서로 힘이 됐으면 좋겠다. ‘이 어린이집은 혐오를 덜 하더라’ 같은 정보도 공유하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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