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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어려서부터 남을 돌보고 배려하며 살아야 했다. 양보도 하고 억울해도 참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산 경험이 평생 축적되어 할머니들은 성숙한 사회적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Pixabay

이웃집 할아버지가 고맙게도 차 끓여 먹으라고 가시오가피를 잘라서 가져다주셨다. 얼마 전에도 주셨는데, 잘 먹었다고 인사를 했더니 말 떨어지자마자 또 가져오셨다. 마당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한심하다고 흉을 보신다. 노인정에서 고스톱을 치는데 두어 사람이 서로 언성을 높이더니 결국 화를 내면서 판을 엎어버리더란다. 판돈이라고 해봐야 서너 명 점심값도 안 되는 액수를 가지고 그럴 일이냐고 한심해하신다. 반면에 며칠 전 할머니 몇 분과 고스톱을 쳤는데 거기는 분위기가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이만 원 남짓을 백 원짜리 동전으로 바꿔와서 그걸로 놀고, 끝나니까 돈을 딴 사람이 잃은 사람들에게 “자기 조금 잃었지?” 하면서 나누어 주고 다 같이 즐겁게 웃으며 끝났단다.

남 돌보고 배려하는 7080여성들

“이 인간들이 어떻게 할머니들만도 못해!”라고 마지막 총평을 달면서 옆집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마치셨다. 그 시점에서 나는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 하고 싶은 말을 안 하면 두고두고 체한 것 같아서, 살살 웃으면서 최대한 공격적이지 않게라도 하고야 만다. “할머니들만도 못하다니요? 원래 할아버지들은 할머니들만 못해요. 그거 모르셨어요?”

지금 노인정에 나가는 70~80대의 남자들, 특히 맏아들은 집에서 받들어 주면서 키웠다. 나이 들어서도 가족들이 시중들어주어 대접만 받았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고 성숙도가 모자란 사람 천지다. 엉덩이만 잠깐 들면 손에 닿을 물건을 남에게 가져오라 하고, 식당에서 별일도 아닌데 애꿎은 종업원에게 소리 지르고, 기분 나쁘다고 고스톱판을 엎는다. 어른답지 못하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것만 해도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

반면에 여자들은 어려서부터 남을 돌보고 배려하며 살아야 했다. 양보도 하고 억울해도 참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산 경험이 평생 축적되어 할머니들은 성숙한 사회적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물론 여기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인품의 깊이가 된 어른

요즘에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라는 책을 읽고, 그 소박한 할머니의 현명함과 넉넉함에 가슴 찡한 감동을 받았다. 혼자 되어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한 할머니가 나이 들어 뒷방으로 물러나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어린 손주를 편안한 사랑으로 품어 키우는 어찌 보면 평범한 이야기인데,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인격으로 늙고 싶다는 소망이 생기게 만들었다.

작가의 할머니가 손녀에게 많이 해준 말의 하나는 “장~혀” 였다. 작은 일에도, 성공을 해도, 실패를 해도 장하다고 하셨다. 뭘 잘했다는 칭찬만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인정이기도 했다. 해야 할 많은 일들과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 사이에서 부대끼며 보낸 힘든 시간 후에 할머니가 장하다고 하시면, 까칠해진 마음의 결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통째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임을 긴 인생을 먼저 산 한 어른으로서 아시고, 너 또한 힘든 순간이 있었을 텐데 장애물을 건너뛰기 위해 발버둥 친 너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장하다 해주신 것이라고 손녀는 나이 들어 이해했다. 할머니의 넉넉한 품 안에서 아이는 온기와 용기를 가지고 커나갔다. 이 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아온 세월이 인품의 깊이와 넓이가 된 진정한 어른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들“만도” 못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할머니들만한 할아버지들이 있다면 매우 다행이라 할 것이다. 드물지만 성숙한 할아버지들은 이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 충북대 심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성역할, 고정관념, 문화간 접촉, 환경관련행동 등의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텃밭과 꽃밭을 가꾸며 사는데, 가끔 세상사를 페미니즘과 심리학의 시각으로 보는 글을 쓰고 있다. 또 하나의 문화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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