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 가담
오정희 작가,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 위촉 논란
문화예술인들, 출협‧문체부에 문제 제기
“공개사과·재발방지 대책 발표해야”
대통령실 경호처 ‘과잉경호’ 논란도
문화예술단체, 고소·고발 검토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 행사장에서 송경동 시인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한 오정희 소설가의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며 행사장에 진입하려다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 행사장에서 송경동 시인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한 오정희 소설가의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며 행사장에 진입하려다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대한민국 문학‧도서출판의 상징이자 얼굴이 동료와 후배 작가들을 검열하고 배제하는 데 앞장선 국가범죄의 실행자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파문이 ‘2023 서울국제도서전’을 계기로 다시 불거졌다. 홍보대사 중 한 명이던 소설가 오정희가 박근혜 정부 때 동료 문인들을 검열하고 지원에서 배제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이었음이 뒤늦게 알려져서다. 항의하는 문화예술인들에게 대통령실 경호처 직원들이 과도하게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오 작가는 홍보대사직을 자진 사퇴했지만 후폭풍은 남았다. 문화예술인들은 오 작가의 사과와 반성, 도서전을 주최한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와 후원한 문화체육관광부에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했다. 대통령실 경호처의 공개 사과와 책임자 처벌도 요구했다.

소설가 오정희(가운데), 김인숙, 편혜영, 김애란, 최은영, 천선란 등 6인이 ‘2023 서울국제도서전의 얼굴’(홍보대사)로 선정됐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소설가 오정희(가운데), 김인숙, 편혜영, 김애란, 최은영, 천선란 등 6인이 ‘2023 서울국제도서전의 얼굴’(홍보대사)로 선정됐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오 작가는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이자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 「중국인 거리」,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등을 펴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 독일어로 번역 출간된 장편소설 『새』로 독일 리베라투르 상을 받아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를 기록했다.

그러나 서울국제도서전의 ‘얼굴’을 맡기엔 부적격 인사였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을 위한 위원회’ 조사와 백서 등에 따르면, 오 작가는 2015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사업, 우수문예발간지사업, 주목할만한작가사업 등에서 사회참여적 예술인으로 지목된 인물들을 검열, 배제하는 데 가담했다. 앞서 2018년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으로 위촉됐을 때도 비판을 받고 물러난 바 있다.

의아한 건 이러한 배경을 몰랐을 리 없는 출협과 문체부의 대응이다. 도서전 개막 전부터 문화예술 단체들은 출협 측에 수차례 문제를 제기했다. 출협은 도서전 기자간담회 취소, 홍보물 노출 자제 요청, 오 작가의 홍보대사 6인 토크쇼 참가 취소 등 소극적 조처만 취했다. 개막일엔 “문체부와 출협 집행부는 홍보대사 선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홍보대사 선정은 도서전 운영팀의 자율적이고 독립적 의사에 따라 운영돼 왔다”는 ‘꼬리 자르기’식 해명으로 빈축을 샀다. 황정은, 오은, 홍은전, 이랑 등 작가들이 ‘오정희 사태’와 관련해 도서전을 보이콧했을 때도, 출협은 이들이 참석하기로 했던 행사를 취소하면서 사유를 알리지도 별도의 입장을 밝히지도 않았다.

“출협은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 동료 문화예술인들의 진심 어린 대화와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실행자를 조직적으로 옹호했고, 마지막까지도 스스로 해촉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남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등 9개 문화예술단체는 지난 18일 코엑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체부와 출협에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정부와 국회에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진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도 촉구했다.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등 9개 문화예술단체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자 오정희씨를 내세운 문체부·대통령실·대한출판문화협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이후 계획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화연대 홈페이지 캡처
문화연대,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 블랙리스트이후(준), 한국작가회의,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등 9개 문화예술단체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자 오정희씨를 내세운 문체부·대통령실·대한출판문화협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이후 계획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화연대 홈페이지 캡처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 행사장에서 한국작가회의 등 문화예술단체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한 오정희 소설가의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며 행사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수진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 행사장에서 한국작가회의 등 문화예술단체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한 오정희 소설가의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며 행사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수진 기자

오 작가에 대한 비판과 사과 요구도 이어졌다. 특히 그를 존경했던 후배 여성 문화예술인들은 당혹감과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 작가는) 내가 글을 써서 벌어 먹고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던 작가”, “나의 페미니즘의 본류로 어린 소녀 시절 여성주의적 자의식에 물을 길어 부었던 그녀”였지만 “통분과 배신감을 뼛속까지 느낀”다면서 “우상은 사라지고, 그림자로 빚어낸 훈장만이 남았다”고 썼다. 허은실 시인도 페이스북에 “이번 일을 마주하고 너무 착잡하고 허탈하고 슬프기도 하고 상실감 같은 것이 밀려온다. 선생님, 사과해 주세요!”라고 썼다. 이난영 작가는 “(‘오정희 사태’는 블랙리스트) 피해 예술가들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두 번 탄압하는 일”이라며 “이번 일로 오정희 소설가에게 사회적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여러 문화예술단체들의 요청처럼 ‘오정희 사태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와 사회적 토론’이 활발히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오 작가는 도서전 이틀째인 지난 16일 자진 사퇴했다. 별도의 입장을 밝히진 않았다. 문화예술 단체들은 오 작가를 향해 “반성도 사과도 없는 자진사퇴”를 거듭할 게 아니라 “동료 작가들,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피해자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해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오 작가가 예술 창작 지원을 위한 정부 산하기관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월 180만원씩 국가 수당을 받고 있다며 “예술원에서도 즉각 자진 탈퇴하라”고 요구했다.

또 오 작가뿐 아니라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송수근 전 계원예대 총장, 손진책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 반성 없는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실행자들과 부패한 예술권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논의가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내달 관련 토론회도 열 계획이다.

정윤희 블랙리스트이후(준) 디렉터는 여성신문에 “우리는 부패한 문화권력이 블랙리스트와 위계성폭력이 작동하는 지지대가 되었다는 걸 충분히 경험했다”라며 “가해자가 조용히 사라졌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는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오 작가를 향한 여성혐오적 비난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가 자신의 권력과 위계를 악용해 저지른 범죄는 검증과 비판의 대상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비난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정 디렉터는 “지금 오 작가에 대한 비판 여론 가운데에는 ‘애초에 여자에게 그런 자리를 주는 맞느냐’거나 ‘여자가 곱게 늙지’처럼 ‘권력을 쥔 여성’에 대한 혐오적 시선도 있다”며 “남성이었어도 그런 반응이 나왔을까 싶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 행사장에서 송경동 시인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한 오정희 소설가의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며 행사장에 진입하려다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고 있다.  ⓒ이수진 기자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 행사장에서 송경동 시인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한 오정희 소설가의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며 행사장에 진입하려다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가고 있다. ⓒ이수진 기자

‘과잉 경호’ 논란 후폭풍도 거세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14일 도서전 개막식에 참석하면서, 대통령실 경호처 경호원들이 행사장에 입장하려는 문화예술인들을 과격하게 제압했다. 송경동 시인을 포함해 문화예술인들이 경호원들에게 붙들려 끌려 나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문화예술 단체들은 이를 “대통령경호법을 위반한 과잉 경호와 폭력”으로 규정하고 경호처의 공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민변 등과 함께 고소·고발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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