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40년간 성평등 법 연구한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명예교수
한국여성개발원 1기 공채 입사, 19년 재직하며
남녀고용평등법, 여성발전기본법 등 제정 연구
여성부 설치 방안 연구, 육아휴직 도입 연구도
국내 첫 성희롱 법·제도 연구 바탕 저서 출간
젠더법학회 초대 회장도... “성평등 판결에 영향”
“여성 징병, 여가부 폐지, 성소수자 인권 관심”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명예교수. ⓒ여성신문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명예교수. ⓒ송은지 사진작가

여성 관련 법도, 정책도, 부처도 없던 시절. 노동법을 연구하다 여성의 문제에 눈을 뜨고 40년간 성평등 법·제도 연구라는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사람이 있다. 바로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다. 익히 아는 남녀고용평등법, 육아휴직 제도, 심지어 여성(가족)부 설치까지, 여성 관련 법과 정책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성희롱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때, 국내 최초로 성희롱 관련법을 연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9일, 올해 정년을 채우고 은퇴한 그를 만나 40년 삶의 궤적을 따라가봤다.

- 지난 2월, 교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소회는.

“성평등 관련 연구를 한 지가 40년이다. 인생 1막은 1983년 한국여성개발원에 입사하고 보낸 19년이다. 이후 법학과 교수로 부임해 21년간 방송대에 몸담았다. 이 시기가 인생 2막이다. 무사히 정년까지 ‘완주’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 짧아서 아쉽기도 하다. ‘이랬어야 하는데’ 싶은 게 많다.”

- 한국여성개발원(현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주로 한 연구는.

“당시에는 헌법에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 하나와 근로기준법의 소위 ‘모성보호법’ 외에는 여성 관련법이 없었다. ‘여성 정책’이란 말도, 여성 관련 부처도 없었다. (개발원에서) 남녀평등 법제를 어떻게 만들지, 성차별적 법은 어떻게 정비할지에 관한 연구를 주로 했다. 구체적으로, 남녀고용평등법, 여성발전기본법, 성평등기본법 제정 방안 연구, (국내)최초로 성희롱에 관한 법·제도 연구, 여성부 설치 방안 연구, 육아휴직, 가족간호휴직 등 제도 연구와 성매매, 성차별, 가정폭력 (연구)까지 안 해본 게 없다. 연구자로서는 행운 같은 기회였다. 19년을 법연구자로서 근속할 수 있었던 건 일에 대한 보람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 방송대 재직 시기에 한 일은.

“그동안 연구했던 걸 기초로 ‘남녀평등과 법’ 교과목을 만들고 2003년부터 강의했다. 강의를 개설할 때, 남학생들도 이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남녀 모두가 함께 상생하기 위한 법이다’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교과목 이름을 ‘남녀평등과 법’으로 만들었다. 명칭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대학원이 생기며 ‘젠더판례연구’ ‘차별금지와 법’ 등을 만들며 학생들이 여성인권과 성평등에 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강의들을 맡아 주력했다.”

- 젠더법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4년 동안 초대 회장을 맡았는데, 여성주의에 기초한 법 연구와 교육을 진흥시키는 게 하나의 목적이었다. 이외에도 법 실무자(판사, 변호사, 검사 등 법조인)와 법 연구자들이 서로 협력하고 활발히 교류하도록 했다. 회장일 당시 240여명의 회원이 있었다. 최근 대법원에 ‘젠더법연구회’가 생겼는데, 제사 주재를 장남이 아니라 성별 관계없이 나이순으로 해야 한다는 판결도 내려지고, 성인지 감수성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등 종전과 많이 다른 판결을 내리고 있다. 법조인들이 젠더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젠더법학회의 연구 결과라고 본다.”

『성희롱: 법과 분쟁처리사례』(김엘림 지음, 에피스테메 펴냄) ⓒ에피스테메
『성희롱: 법과 분쟁처리사례』(김엘림 지음, 에피스테메 펴냄) ⓒ에피스테메

- 성희롱 관련 개념과 쟁점을 집대성한 책을 출간했다. 성희롱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유는.

“성희롱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장의 문제고, 다른 종사자에게도 피해를 준다. 이는 결국 국가와 사회의 문제다. 게다가, 권력과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취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법 조항 몇 개를 고치는 게 아니라 권위주의적 위계구조도 고치고, 가부장적 문화도 고쳐야 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미투’(Me Too, 성폭력 고발 운동) 이후 ‘이런 법도 있었어?’ 할 정도로 관련법이 많이 생겼는데 잘 안 알려졌다.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관련법과 사례를 집대성했다. 성희롱 예방교육, 관련 입법, 행정, 재판, 인권위 결정 등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성희롱 문제 외에 관심을 두고 있는 현안은.

“먼저, 소위 말하는 ‘젠더갈등’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성들에게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현행 법제는 고쳐져야 한다. 유럽 사법재판소는 ‘군대는 전쟁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직업훈련 장소, 취업의 기회인데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건 차별’이라고 2020년 판시하기도 했다. 군대에는 (전투 외에도) 복지·행정 등 다양한 업무가 있다. 여성도 다양한 형태의 병역 의무를 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윤석열 정부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이야기하는데, 유엔(UN)은 국가적 차원의 여성정책 추진 기구를 두라고 하고 있다. 아직도 성차별, 성희롱, 성폭력 등에서 여성이 피해자의 절대다수인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여가부를 두는 게 필요하다는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고 싶다. 셋째로, 이번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통과가 또 안 됐다. 우리 사회가 ‘젠더’라는 용어를 쓰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데 벽이 높은 것 같다. 성별, 성정체성, 성적기호 등에 대해 어떻게 개념화하고 합의를 이끌어낼지 고민하고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직장 내 괴롭힘이 최근 중요한 문젠데, 6월에 관련 책이 또 발간된다. 정규직 교수로는 퇴직했지만, 명예교수로 여성인권과 성평등 관련법 연구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제주에 거처를 마련했다. 제주 지역에서의 여성관련 활동도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다.”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학부와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박사학위를 받은 노동법과 법여성학·젠더법학 전문가다. 1983년 한국여성개발원(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1기 연구원으로 입사해 성평등 법제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성평등 관련법을 가르쳤다.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기획단 단원, 한국노총 여성정책위원회 위원장,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에 고용노동부로부터 국민포장을, 2018년에 대법원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지난 2월 교수직을 은퇴해, 현재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제주에서의 인생 3막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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