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홍현경의 벗는 벗들]

일상이 혁명이 될 수 있을까? 밥 먹는 일이 사회운동이 되고, 내 일터가 곧 운동 현장이 될 수 있을까? ‘먹고사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가까워지면, 그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먹고산다’는 건 생계를 유지하는 밥벌이를 한다는 거고, (띄어 쓴) ‘먹고 산다’는 건 말 그대로 뭔가를 입에 넣어 먹고 산다는 말이다. 먹고사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가까워진다는 건, 결국 자급하는 삶을 말한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꿈지모 옮김/동연출판사) ⓒ동연출판사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꿈지모 옮김/동연출판사) ⓒ동연출판사

자급하는 일상이 뭔데? 하고 물으신다면,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를 함께 쓴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의 말을 빌려야겠다. 자급하는 삶은 “자부심, 위엄, 자기 확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능력”이며 “스스로 삶을 생산하고 재생시키며, 자기 힘으로 서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삶이자 “자유, 자율, 자기 결정,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기반의 보존, 문화적이고 생물학적인 다양성”을 뜻한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내 시간을, 내 힘을, 내 근육을, 내 창조성을 ‘돈 주는 사람’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을 유지해 줄 것들을 생산하는 데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함께 먹을거리를 길러 갈무리해 먹는 일상, 누군가와 나누어 먹는 일상, 사랑하는 이를 돌보는 일이 곧 밥벌이가 되는 일상, 경쟁과 따라잡기를 그만둔 일상, 저마다 가진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상, 다른 생명이 착취되는 것을 눈감지 않는 일상, 이런 일상이 곧 자급하는 삶이고 그런 삶이야말로 진짜 운동이고 정치가 될 수 있다.

거꾸로, 하루 대부분을 돈 버는 일로 보내야 하는 삶은 부당한 착취를 눈감아야만 한다. 내 밥을 차려 먹는 일도 쉽지 않은데, 쌀과 채소를 기르거나 옷을 지어 입거나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일이 어떻게 일상에서 가능하겠는가. 하물며 동네 뒷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강에 어떤 오염 물질이 흘러드는지, 더 값싼 제품을 만드느라 무엇이 희생되는지, 내가 쓸 전기를 위해 누가 쫓겨났는지 둘러볼 여유가 생기긴 더욱 어렵다. 왜 철새가 텃새가 되고, 왜 15분마다 한 종씩 생물이 사라지고, 왜 해마다 자연재해가 심해지는지 고민할 틈이 어디 있겠나.

자급하는 삶을 산다면? 아침에 괴롭게 눈을 뜨진 않을 거다. 알람을 끄고 한숨을 쉴 일도 없다. 모든 이가 자급하는 삶을 산다면 지금 전국, 아니, 전 세계의 활동가들이 나서서 막으려는 무수한 막개발과 생태 학살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쓸데없는 차별과 혐오, 재미없는 노동, 나를 좀먹는 경쟁, 과시를 위한 소비,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저당 잡힌 삶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깃발을 들어야 하는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우리 삶에서 운동은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수다를 떨고 도구를 쓰는 평범한 일상에서 누구든 할 수 있다. 동네마다 자급하는 생태 공동체가 굳건히 자리할 때, 사는 방식이 곧 운동이 될 때, 먹고사는 일이 먹고 사는 일일 때, 일상은 곧 혁명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평범하게 행하는 일들이 ‘악’이 아니라 ‘선’이 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문홍현경 에코페미니스트
문홍현경 에코페미니스트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