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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업적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여성

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고작해야 퀴리부

인과 그 딸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이름

의 전부가 아닐까 한다.

혹은 재능과 열의가 있었으나 살림과 육아

에 시달려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아인슈타인의 부인을 안타까움 속에서 떠올

릴 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제인 오스틴이

나 조지 엘리어트, 버지니아 울프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여성작가들을 꼽아보며 역

시 과학분야 보다는 문학이나 예술분야가

여성에게 더 적합하다는 생각에 쉽게 동조

해버림직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근거없는 편

견인가를 일깨워 주는 책이 출판, 번역되었

다. 7년이 넘는 연구기간을 거쳐서야 나올

수 있었던 『불꽃같은 생애-수학자, 작가,

혁명가 소피야 코발레프스카야 전기』(앤

히브너 코블리츠 지음, 이혜숙, 정계선 옮

김, 이대 출판부)가 바로 그 책이다.

수학자와 작가와 혁명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경력의 소유자 소피야 코발레

프스카야는 누구일까? 1850년 모스크바에서

탄생한 이 여성을 따라다니는 경력은 화려

하다.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 이

태리 밖의 유럽에서 대학에 자리잡은 최초

의 여성, 권위있는 과학상의 상금을 더 높

이 올려받을 정도로 수학적 업적이 탁월했

던 여성, 그리고 중요한 과학잡지의 편집인

으로 19세기 중반 유럽 과학세계의 중심에

서 당당히 활약했던 여성.

여성의 지위가 일천하던 시대에 그는 어떻

게 탁월한 전문가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

까? 그것은 그가 부유한 귀족계급의 일원으

로 태어났기 때문이거나(당시 귀족계급의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전문 직업을 갖

는 데 아주 불리한 조건이었다), 혹은 아주

어릴 때부터 추상적인 수학 개념에 흠뻑 빠

져들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으며, 또 학문을

위해서라면 위장 결혼도 서슴지 않을 정도

로 확고한 결단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

다. 그것은 그의 정신을 살찌운 진보적인

토양 때문에 가능했다.

계급적으로나 성적으로 모순의 정점에 서

있던 조국 러시아의 문제 해결을 자임하고

나섰던 지식인들은 교육과 자연과학과 여성

의 잠재력을 강하게 믿었고 소피야는 그들

의 그 믿음의 수혜자였다. 소피야를 비롯한

몇몇 여성들은 그들의 지지와 후원속에서

가부장적인 러시아 사회를 떠나 서유럽에서

전문적 지식인의 길을 닦을 수가 있었던 것

이다.

소피야는 자신이 원하던 박사학위를 받았으

나 결코 추상적 학문의 세계나 이기적 삶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마흔한살이라는 나

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자신이 사회

에 진 빚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는 곤경에 처한 여성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면 언제라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혁명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평생 진보집단을

지지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그는 수학적 창

조성을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정치적

관심과 결합시킨 몇 안되는 훌륭한 여성이

었다. 그리하여 그는 ‘젊은 여성이 지향하

는 눈부신 빛’으로 후대 여성들의 가슴속

에 살아있다.

김영미/ 이대 영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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