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만취 여성 준강간 미수’ 남성 무죄 확정
여성단체 “가해자 중심 판결”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대위가 '사법부가 외면해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홍수형 기자
4월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대위가 '사법부가 외면해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홍수형 기자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남성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하자 피해자 지원 단체는 이런 판결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4월 27일 준강간미수 혐의로 기소된 20대 남성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지난 2017년 5월 5일 서울의 한 클럽에서 처음 만나 술을 마신 여성 B씨를 경기도의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준강간미수)를 받는다.

당시 친구들과 클럽에서 놀던 한 여성이 가해자와 합석해 술을 한 잔 마신 후 모든 기억을 잃고 준강간 피해를 당한 이번 사건에서 피고인은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날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 판결이 나와 무죄가 확정됐다.  

166개 여성단체가 모인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4월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사법부가 외면해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B씨는 입장문을 통해 "성폭력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후퇴시킨 시대착오적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B씨는 “비록 법정 다툼에서 원치 않는 결과가 나왔으나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씨를 붙일 것이고 조용한 분노는 계속 타올라, 그 불길은 점차 진화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질 것이다. ‘실수’를 바로잡지 못한 법관들은 오명을 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입장문은 이안나 사단법인평화의샘 활동가가 대독했다. 

김태옥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이번 사건은 상담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이었으나 신고부터 항소심 판결까지 사법적 의무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피해자의 권리는 완전히 배제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술이나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피해에도 불구하고 준강간 사건에 대한 편견과 통념으로 신고조차 하지 못 하고, 신고를 한 뒤에도 수사 및 사법기관에서 2차 피해를 당하고, 결국은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가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 처벌받지 못하던 준강간 사건이 오늘의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변화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대위가 '사법부가 외면해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홍수형 기자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대위가 '사법부가 외면해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홍수형 기자

피해자 측 이영실 변호사의 발언은 김윤정 성착취피해아동청소년지원센터 띠앗 활동가가 대독했다. 이 사건의 원심은 피고인의 ‘클럽에서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관계에 동의를 하였다는 진술’ 등에 근거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이 사건 당시 피고인의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하려는 준강간의 고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관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영실 변호사는 △피해자는 성관계에 동의한 사실이 없다 △만약 동의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원심의 고의 판단은 타당하지 않다 △판례를 살펴보더라도 원심의 판단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현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서울인천권역 대표는 “준강간 사건에서 들여다봐야 할 것은 사회적 편견과 왜곡된 통념을 이용한 가해자의 거짓된 진술이 아니라 피해자의 개별적인 상황과 맥락,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구체적인 상황 등에 따라 피해자의 대처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며 “심신상실 및 항거불능 상태의 성폭력 피해는 피해 상황을 명확하게 진술할 수 없는 상태임을 고려해 증명력 있는 진술과 증거를 피해자에게 반복해서 요구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치밀하게 계획한 범죄, 조직적인 범죄, 진술의 모순으로 준강간 사건의 실체들 들여다봐야 함을 사법부는 인식하고 오늘의 판결에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법부가 준강간 구성 요건인 ‘심신상실’과 ‘항거불능’에 대해 성인지적 관점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소연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소장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왜곡된 통념을 전제로 술에 취한 피해자의 동의를 함부로 단정하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할 의사가 있었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명시적이고 자발적인 동의 표시를 할 수 있었는가, 했다고 믿을 만한 사정이 있었는가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대위가 '사법부가 외면해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홍수형 기자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대위가 '사법부가 외면해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홍수형 기자

공대위는 “무죄 확정 판결은 만취한 여성을 상대로 조직적으로 유인, 강간하는 행위도 용인하는 판단기준이 될 것이기에 절망스럽다. 이런 판결을 내놓을 것이라면 대법원은 3년 동안 대체 무얼 고민한 것인가?”라며 “대법원은 정의로운 판결을 기대한 피해자와 그를 지지하여 연대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력화했다. 인권침해와도 같은 장기계류로 불안하고 고통스러워한 피해자에게 내놓은 답변이 무죄라니 그 존재가 무색하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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