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미술전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 주최
윤석남부터 신진 작가들까지
17인 작품 50여 점 한자리에
5월7일까지 세종미술관 2관

박영선 작가의 ‘Prison’과 ‘윈드벨’. ⓒ이세아 기자
박영선 작가의 ‘Prison’과 ‘윈드벨’. ⓒ이세아 기자

어떤 여자들에게 집은 감옥이다. 집 모양 구조물에 갇힌 분홍 유니폼 차림의 여자들이 힘없이 쓰러지거나 매달려 있다. 집 모양의 풍경(風磬) 속에도 여자가 갇혀 흔들리고 있다. 박영선 작가의 ‘Prison’과 ‘윈드벨’이다. 가부장제 속 여성들의 자아 혼란과 갈등을 직관적으로, 섬뜩하게 표현했다.

전시장 반대편엔 ‘페미니스트 비너스’들이 있다. 2010년 소버린예술재단 아시아작가상을 받은 데비 한 작가의 ‘여신’ 시리즈다. 서양 고대 조각상의 얼굴과 평범한 한국 여성의 신체를 합성한 사진 작업이다. 미술대학 입시가 요구하는 획일적 석고 데생, 서구적 외모에 대한 동경과 성형수술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했다.

데비 한, 좌삼미신, 라이트젯 프린트, 180x250cm, 2009 ⓒ경기도미술관
데비 한, 좌삼미신, 라이트젯 프린트, 180x250cm, 2009 ⓒ경기도미술관
여성주의 전시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 전시장 전경.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 제공
여성주의 전시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 전시장 전경.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 제공

여성주의 전시 ‘발푸르기스의 밤: 한국의 마녀들’ 전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2관에서 개막했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 대표작가 윤석남부터 신진 작가들까지 여성 작가만 17명 참여한 전시다. 이들의 대표작·신작 등 50여 점을 모았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첫 번째 작품은 윤석남 작가의 ‘홍살문’이다. 조선 시대 정절의 상징, 홍살문에 여성의 얼굴이 보인다. 그 넋을 불러내 말로 다 못 한 고통과 설움을 위로하는 듯하다.

노승복 작가의 ‘1366 프로젝트’도 있다. 얼핏 보면 알록달록 화려한 추상화, 실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상처를 촬영해 수천 배로 확대한 사진이다. 제목의 1366은 여성긴급전화번호다. 작가는 2002년부터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게 된 일을 계기로 2003년부터 드러나지 않는 가정폭력을 포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노승복, 1366 프로젝트, 2003, 디지털 프린트, 100x200cm ⓒ성곡미술관
노승복, 1366 프로젝트, 2003, 디지털 프린트, 100x200cm ⓒ성곡미술관
여지, Beauty Recovery Room ⓒ여지 작가 홈페이지 캡처
여지, Beauty Recovery Room ⓒ여지 작가 홈페이지 캡처

억압받고 재단당하는 여성의 몸을 여성의 시선으로 주목한 작업도 눈길을 끈다. 성형수술 후 회복실(Beauty Recovery Room)에 있는 여성들을 포착한 사진들이다. 한국 여성들이 겪는 외모 강박과 여성혐오를 포착해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여지 작가의 연작이다. 구지언 작가의 ‘성형성을 가진 붉은 벽돌’은 거칠고 단단한 벽돌과 연약하고 민감하다고 느껴지는 여성기를 합성했다. 작가 자신과 주변인들의 성기를 직접 본떴다.

전시장의 중간에 설치된 미디어아트 ‘Virtual Broken Mountain’은 마녀들이 여는 연회 ‘발푸르기스의 밤’을 재현했다. 모닥불 앞에 모인 여성들이 신체를 가리는 쓰개와 너울을 태워버리고 신나게 춤을 추면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의 미디어아트 작업 ‘Virtual Broken Mountain’. 마녀들이 여는 연회 ‘발푸르기스의 밤’을 재현했다. ⓒ이세아 기자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의 미디어아트 작업 ‘Virtual Broken Mountain’. 마녀들이 여는 연회 ‘발푸르기스의 밤’을 재현했다. ⓒ이세아 기자
춘희, 극락도, 2020, 장지에 채색, 130x162cm. 한국 토속신인 마고 할미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여성주의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작가다. ⓒ이세아 기자
춘희, 극락도, 2020, 장지에 채색, 130x162cm. 한국 토속신인 마고 할미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여성주의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작가다. ⓒ이세아 기자
윤석남 작가의 ‘우리는 모계가족’. (왼쪽부터) 2016년, 2018년작. ⓒ이세아 기자
윤석남 작가의 ‘우리는 모계가족’. (왼쪽부터) 2016년, 2018년작. ⓒ이세아 기자
최문선 작가의 작품 ‘자승자박’과 아티스트 토크 현장.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 제공
최문선 작가의 작품 ‘자승자박’과 아티스트 토크 현장.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 제공

최문선 작가는 나체로 밧줄에 묶인 남자의 뒷모습과 성경 구절을 통해 ‘스스로 가부장제에 갇힌 남자들’을 표현했다. 제목은 ‘자승자박’. 가로 344cm, 세로 250cm의 대형 스티커를 계단에 붙여 완성했는데, 관람객들이 마음껏 밟아도 된다. 2022년 9월 국민대 예술대 야외조각전 때 처음 공개했는데, 당시 학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외에도 ‘여성주의 사진’의 길을 연 박영숙 작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미디어 아티스트 송상희 작가 등 거장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세종문화회관(https://www.sejongpac.or.kr/), 사일런트메가폰(https://www.silentmegaphone.com/)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5월7일까지.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 멤버들. ⓒ사일런트메가폰 제공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 멤버들. ⓒ사일런트메가폰 제공

이번 전시를 기획한 콜렉티브 사일런트메가폰은 2017년부터 매년 여성주의 전시를 선보인 전시기획 집단이다. 1999년생부터 1989년생까지 미술대학 출신 2030 여성 7인으로 구성됐다.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전후로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을 갖고 온라인 활동을 하다가 모였다.

“여성들이 직면한 이슈를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전시 기획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2017년부터 서울·부산 등지에서 이번 전시까지 합쳐 총 일곱 차례 전시를 열었다. 미러링, 탈코르셋, 남성 성적 대상화, 비혼-비출산-비연애-비섹스(4B)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남성들도 사일런트메가폰의 전시를 찾는다. 이성 커플이 함께 오기도 하고, 전시 개막일에 와서 진지하게 한 시간 동안 전시를 관람한 남성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형 미술관이나 주요 갤러리가 아닌, 개인들이 여는 ‘페미니즘 미술 전시’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지속될 거라고 본다. “저희 말고도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다른 여성 크루들이 있어요. 저희는 이번 전시 후 잠시 휴식기를 갖지만 끝나면 돌아올 예정이고요. 저희를 격하게 좋아해 주는 분들도 있지만, 저희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가부장제의 불합리성에는 고개를 끄덕이거든요. 저희 전시가 계속된다는 것 자체가 저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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