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새끼만 금쪽 같은가요?”
“할머니 새끼만 금쪽 같은가요?”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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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복지관이나 노인대학에서 어르신들과 수업을 할 때 한 번 만나고 헤어지는 일회성 특강이나 교양강좌를 제외하고, 두 번 이상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되면 첫 시간 마지막 무렵에 늘 두 가지 숙제를 내드린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노인이란 단어가 등장하기만 하면 눈여겨보고 오시는 것이 첫 번째 숙제이고, 또 한 가지는 동네 골목길이나 슈퍼마켓, 목욕탕, 지하철 같은 데서 동년배 노인분들이 눈에 띄면 유심히 바라보면서 잘 관찰해 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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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번 수업에서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잊지 않고 숙제 검사에 들어간다. 신문에 난 노인 관련 기사를 오려서 들고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텔레비전 9시 뉴스에 나왔던 노인 관련 사건·사고 소식을 자세히 전해주는 분들도 계신다. 그런데 두 번째 숙제, 즉 '동년배 노인 관찰하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역시 지하철 안 노약자 보호석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하철은 경로 우대로 어르신들이 무임 승차를 하실 수 있어, 아무래도 이용 횟수가 많기 때문에 오는 결과일 것이다.



하루는 아버님 한 분이 숙제로 아예 리포트를 써왔다며 동급생들 앞에서 발표를 하겠다고 청하셨다. 제목을 보니 '전철내 경로석 소고(電鐵內 敬老席 小考)'. 한자를 섞어서 열심히 쓰신 그 정성을 봐서라도 발표 기회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A4 용지 두 장을 꽉 채운 아버님의 리포트에는 노약자 '보호석'을 노약자 '지정석'으로, '양보합시다'를 '착석 절대 금지'로 바꾸자는 다소 급진적인(?) 제안도 있었지만, 오히려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는데 '비노약자의 좌석 무단 점유 실태'라는 제목 아래 다른 몇 가지 이야기와 함께 '20∼30대 딸을 억지로 좌석에 앉히려는 노인의 경우'라고 적혀 있었다. 앞에 동년배 노인이 서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자신의 젊은 딸을 앉히지 못해 애를 쓰는 노인의 모습에서 느끼는 거부감을, 어찌나 생생하게 설명해 주시는지 많은 분들이 박수로 공감을 표시하셨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며칠 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 두 아이와 함께 탄 지하철에서 좌우에 두 아이가 앉고 나는 가운데 앉았는데(물론 일반석),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타서는 작은 아이 앞에 서시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이가 얼른 눈치를 채고는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하고 내 무릎으로 옮겨 앉았다.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으셨던 이 할머니께서 연신 주위를 살피더니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손짓해 부르시는 것이었다. 다가온 그 여학생에게 하시는 말씀. “할머니는 저기 저 쪽 노약자석에 가서 앉을테니 네가 여기 앉아서 가라. 얼마나 다리 아프겠니, 응?” 물론 그 손녀는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순간 옆에 앉은 내가 느낀 씁쓸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초등학교 아이가 자발적으로 일어나 싹싹하게 자리를 양보할 때는 건성 인사 한 마디 없더니, 자신의 고등학생 손녀에게는 자리 양보라…. 누가 보나 약자에 속하는 남의 손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녀만 금쪽 같은 할머니. 할머니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참 입안이 썼다. 마음이 상했다. 20∼30대 딸을 억지로 앉히려 드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동년배 어르신이 느꼈다는 거부감을 이해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계속 손녀를 앉히지 못해 애달파하는 할머니께 참지 못하고 말씀드린다. “저 다음 정류장에 내리니까 조금만 참았다가 여기 앉히세요, 네?” 그제야 할머니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정말 부모의 내리사랑은 그 할머니처럼 내 새끼에게만일까? 아니,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그 동안 어르신들께 내가 받아온 내리사랑이 바로 그 증거이다. 내 새끼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 그 할머니도 순간 잠시 잊었던 것뿐이리라.





유경/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

cafe.daum.net/gerontology

treeapp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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