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제일 편한 룸메이트 남편과의 동반여행에 식구 걱정도 덜어

열 이틀에 걸친 동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그간 무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생 더워 죽겠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던 친구조차도 올핸 견디기 힘들었다고 하소연을 할 지경이다. 운 좋게도 올해는 확실하게 더위를 피해 도망다닌 셈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 성수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예전 같으면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은 일부러 피해 다녔는데 언제부터인가 사안에 따라서는 그냥 남 따라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날을 잡았었다. 이것도 나이 덕분이겠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동유럽은 난생 처음 가는 지역이니까(하긴 이 지구상에 가 본 지역이 얼마나 될까마는) 주의 깊게 둘러보고 메모도 꼬박꼬박해서 글 쓸 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와야지, 야무지게 마음먹었는데, 웬 걸 준비해간 메모장을 단 한 장도 써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불과 열흘 동안 무려 여덟 나라를 방문한다는 무지막지한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어느 날은 열 한 시간인가를 줄곧 버스를 타야 했다.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았으니 언제 메모를 할까. 게다가 타고난 게으름은 또 어쩌고.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앉자마자 이미 어디어디를 갔다 왔는지 기억이 아리송했다. 크고 작은 폭포가 수없이 이어졌던 그 청정한 에메랄드빛 호수가 크로아티아였는지 슬로베니아였는지 계속 헷갈렸다. 아니 크로아티아란 나라 이름조차도 자꾸만 딴 대륙에 있는 코스타리카란 나라하고 뒤섞일 정도였다. 누가 들으면 아이고, 그 돈 나 주고 어르신께선 집에서 에어컨 쾅쾅 틀어 놓고 낮잠이나 주무시지 웬 욕심을 그리 냈을까 흉을 봐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 대한 총평은 한 마디로 참 즐거웠다는 것이다(이렇게 쓰고 보니 초등학교 1학년생의 여름방학 일기장 같군!). 평소에도 집 멀미 탓인지 여행중독증 탓인지 나는 집만 떠나면 마음이 붕 뜨고 행복해지는 증상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이번 여행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적도 없었다. 늘 무언가가 뒤통수 한 귀퉁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건 내가 비록 A학점짜리는 못될망정 평생직 주부이기 때문이다. 이 직업은 대개 몸은 집을 떠나도 마음은 집에 매이기 십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집에 남은 식구가 내내 걸리는 것이다. 이번 패키지 여행에 동반한 여섯 명의 주부도 모두 혼자 여행을 떠나온 것에 대해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얄밉게도 나는 남편과 동행이었다(나이 들어 남편과 함께 여행 다니는 여자도 얄미운 년 시리즈의 뉴 버전에 속한단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제일 편한 룸메이트가 생긴 셈이다. 또 한 집에 살고 있는 막내는 일이 바빠서 집에 아주 가끔 들어온다. 들어와도 밥을 먹지 않으니 엄마노릇을 안 해도 된다.

더구나 나는 금년을 내 맘대로 안식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당분간 밀린 원고도, 약속된 강연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백수였다. 가족도 일도 그 무엇도 나의 발목을 잡지 않는 데다가 한때 바닥을 기었던 몸도 그 동안 푹 쉰 덕에 어느 정도 되살아났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세상의 주부들이여, 희망을 가집시다!).

이런 원초적인 조건 덕분만이 아니었다. 여행 첫날의 예기치 않은 불상사도 이번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나의 넋을 빼앗을 만큼 아름다운 프라하의 첫 밤, 세상에, 멀쩡한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자정이 되면 나온다고 하더니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사회주의의 관행이 남아 있던 탓인지 호텔 측에선 미안하단 기색도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우리 팀만 패닉 상태였지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들은 유유자적했다는 것.

이튿날 아침 호텔에서 제공한 탄산수 한 병으로 겨우 양치질을 한 우리 팀은 그 다음 호텔에 대한 기대치가 최하로 낮아질 밖에. 더도 덜도 말고 그저 물만 나와 다오. 그러면 최고 호텔로 생각하고 행복해 할 테니.

아무튼 여행은 가르쳐 주는 게 많다. 그러므로 젊을 때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젊을 때는 시간도 돈도 없기 쉽고, 겨우 시간과 돈이 있을 즈음에는 힘이 없기 쉬우니, 이 노릇을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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