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의 외도 잔혹사-서양화가 나혜석

근대기, 여성외도의 적나라한 희생자로는 신여성의 대표주자이자 첫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896년 경기도 수원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고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유학 시절, 근대시 개척자인 최승구와 운명적인 연애에 빠져들었으나 연인의 죽음 후 1920년 외교관 출신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6년 후 나혜석은 오랫동안 열망하던 유럽 여행을 떠나는데 당시 사람들이 꿈도 못 꾸던 해외여행이 아이러니컬하게 그의 파국의 전주곡이 됐다. 파리에서 천도교 지도자 최린을 만나 잠깐 외도에 빠져들게 되고, 이때 나혜석이 최린에게 보낸 편지가 빌미가 되어 그녀는 모든 친권을 박탈당하고 돈 한푼 받지 못한 채 이혼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에서 '상대방의 불품행을 논할진대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든 남자라는 명목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부여하는 사회제도를 비판한다. 또 이혼을 종용했던 최린이 정작 이혼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나혜석을 철저히 외면한 것에 대해 분노해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나혜석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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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스스로는 이혼을 자아 발전의 계기로 삼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으나 1935년 열린 전람회에 대한 조선 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사회 어느 곳에도 몸 붙일 곳이 없고 친지들조차 그녀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나혜석은 신경쇠약에 걸리게 된다. 해방 후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진 그녀는 감금과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몰래 빠져 나오기를 반복한다. 아이들을 보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올랐다고 할 정도로 모성애가 강했던 그녀는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을 감춘다.

◀나혜석은 단 한 번의 외도로 친권과 재산권, 예술가로서 활동 등 인생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혼 전 아이들과 함께 한 나혜석.

시대를 앞서는 여성이자 선각자였던 나혜석의 빛나던 생은 한번의 외도로 나락으로 떨어져 최후에는 행려병자로 떠돌게 된다. 1948년 12월 그녀는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눈을 감았다.

서김현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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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나혜석 전집>(이상경/태학사) <원본 정월 라혜석 전집>

(서정자/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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