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 포럼 열려
폭력피해지원시설 입소자 56%가 장애인
장애인 피해자 86%는 정신질환 있어
불안·우울·분노조절장애 등 표출

피해지원기관은 준비 부족에 허덕
소통·적절한 서비스 제공 어려워
현장 대응 역량·지역사회 안전망 강화하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깨야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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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성폭력 피해지원시설에서 한 피해자가 환청을 듣고 자해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다른 시설에서는 피해자가 칼을 들고 부엌을 돌아다녀서 충격을 줬다. 공통점은 이들 모두 정신적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현장은 준비되지 않았는데, 정신적 장애가 있는 피해자들이 늘고 있다. 전문적인 지원체계가 절실하다.” 요즘 전국 여성폭력 피해지원시설 종사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문제다.

지난 24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여성인권포럼은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는 자리였다. ‘정신적 장애 범주의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과 연대 방안’을 주제로, 피해지원기관 종사자와 전문가들이 참석해 현장 사례와 정책 제언을 나눴다.

장애가 있는 여성폭력 피해자들의 상담·시설 이용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전국 성폭력상담소 이용자의 11.3%(2960명), 지원시설 입소자의 56.2%(166명)가 장애인이다. 또 여성폭력 피해지원기관을 이용한 장애인 피해자의 85.7%는 정신적 장애인이다. 발달장애 74.2%, 신체장애 14.3%, 정신장애 11.5% 등이다(여성가족부, 2021 성폭력 피해자 지원사업 운영 실적 보고).

정신적 장애를 겪는 여성폭력 피해자들은 대체로 불안장애, 우울장애 증상을 보인다. 공격성 분노조절장애, 정신증적 증상, 인격장애 등도 나타난다. 의사소통의 어려움, 시설 종사자들과의 약속이나 규칙을 잘 지키지 않음, 위생관리나 자기관리 어려움 등으로 이어진다(제도와사람 연구소, 2021).

피해지원 현장은 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신과적 증상으로 인한 돌발상황 대처 어려움’(25.0%)을 호소하는 피해지원기관이 많다. ‘연계 가능한 외부자원 부족’(19.6%), ‘발달장애 및 정신과적 증상을 가진 폭력피해 여성에 대한 상담 연계 부재 또는 전문성 결여로 의사소통 어려움’(17.6%)도 현장에서 말하는 주요 애로사항이다. 제도와사람 연구소가 2021년 8월 25일~9월 20일까지 전국 폭력피해지원기관 총 207곳을 조사하고, 유형별 실무자 등을 면접 조사한 결과다. 

“정신적 증상으로 인해 지속적·반복적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음. 상담원들은 정신적 증상 관련 전문성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한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함. 센터 업무 마비·과부하로 이어지기도 함.” (여성긴급전화 1366)

“피해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정신질환이 있는 피해당사자들과 마주하고, 그들이 종사자들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함. 장애인 수사 시 필요한 전문인력이 부족해 수사가 지연되고 진술 신빙성이 떨어지는 어려움을 겪음.” (해바라기센터)

“심각한 정신과적 증상이 있는 폭력피해 이주여성은 통역 도움을 받더라도 의사전달이 어려워 증상과 욕구 파악이 어려움. 폭력피해 이주여성이 ‘정신장애’ 진단명을 갖게 되면 이혼 소송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임. 상담사들은 서비스 지원과 여성이 처할 수 있는 불이익 상황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음.” (폭력피해이주여성상담소)

지난 24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여성인권포럼 현장.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지난 24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여성인권포럼 현장.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김영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젠더폭력연구본부 연구위원은 “정신적 장애인의 가정폭력, 성폭력 등 폭력 경험률은 다른 장애인보다 높다. 정신적 장애가 있는 여성의 정신건강은 폭력 피해 경험 후 악화할 수 있고, 절반 이상이 자살 생각과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자살예방센터 등 유관기관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지금은 정신과 진단서 등 복잡한 서류 절차가 필요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기존 지원체계는 등록된 중증정신질환자 위주라서, 미등록 정신장애인이나 비교적 가벼운 정신질환을 겪는 피해자들은 보호받기 어렵다. 

김정현 제도와사람 연구소 대표는 “피해자들은 1366, 정신건강복지센터, 정신장애보호시설 등을 회전문처럼 반복적으로 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나마도 요즘은 정신질환 피해자를 거부하는 보호시설이 많다고 한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전문 의료진이 빠르게 개입할 수 있는 일시 쉼터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다. “심각한 정신과적 증상을 가진 여성폭력 피해자를 일시적으로 보호하면서 증상을 관리하고, 이후 보호시설이나 정신재활시설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식이다.

현장의 대응 역량도 강화해야 한다. “여가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전문가 자문단을 구성하고, 현장 종사자들에게 정신적 장애 관련 이해·실질적 대응법을 교육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종사자 소진 예방을 위해 인력 충원·처우 개선, 지원기관 의료비 지원 예산 확대, 지원기관 간 연대, 기존 지역사회 연계 체제와의 협력 강화”도 강조했다.

피해자 자립 지원체계를 구축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피해자들이 자립해 지역에서 살 수 있도록 직업·주거 지원, 지속적 사례관리 등을 제공하는 지역사회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신적 장애가 있는 피해자에 대한 편견도 깨야 한다. 여름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 총괄팀장은 “폭력피해지원기관 종사자들조차도 ‘발달장애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성폭력을 겪어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며 “장애인의 공격성, 부적절한 행동 등이 폭력과 학대의 영향으로 발생한 문제, 치유·상담이 필요한 문제인데도 단순히 장애로 인한 문제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재희 부산성폭력상담소장은 “기존 장애인 피해자 지원 체계는 발달장애·신체장애 중심이라서 정신적 장애가 있는 피해자들은 소외됐다. 사회적 지지 기반도 약하다”고 했다. 또 “우리 스스로 정신적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 한다. 작은 파도에도 상처받는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며 “여성주의 전문의와 함께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으로 접근하면 치유·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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