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여성신문
ⓒ뉴시스·여성신문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라는 말이 도시 사람들에게 사어처럼 잊힌 지 오래다. 요즘은 채소값까지 고공행진이라 밥상에서 싱싱한 나물 반찬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들판에 나가보라. 그럼 가을이 얼마나 풍성한 계절인지 안다. 한로가 가까워지며 밤송이가 일제히 터지고 봄에 떠났던 달래와 냉이도 돌아왔다. 텃밭의 위세도 만만찮다. 배추는 결구를 맺기 시작하고 맷돌호박엔 하얀 분이 내려앉아 수확을 기다린다. 고추와 들깨도 마지막 힘을 다하는 중이다.

농사는 처리가 70퍼센트라는 말이 있다. 수확이야 즐겁다지만 정신없이 거두다 보면 눈앞에 할 일이 잔뜩 쌓이고 만다. 요리를 하든, 냉동하거나 묵나물을 만들든 농작물은 누군가의 손이 닿아야 밥상에 오르고 쓰레기 신세를 면한다. 그리고 그 골치 아픈 처리의 꼭대기 어디 쯤에 고구마줄기가 자리잡고 있다.

한 번이라도 손질해본 사람은 고구마줄기가 얼마나 골치아픈 식재료인지 안다. 1시간 반 이상을 낑낑거리며 껍질을 벗겨야 기껏 줄기 500~600그램을 손에 넣으니 말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 인터넷에는 “고구마줄기 쉽게 빨리 벗기는 법”이 수백 개씩 올라와있다. 소금물에 담갔다가 벗기기, 한나절 숨을 죽인 다음에 벗기기 등등……내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뜨거운 소금물에 3분 정도 데치는 것이다. 그럼 껍질이 끊기지 않고 죽 벗겨지지만 어차피 난 줄기를 데쳐서 김치를 만들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어쨌거나 김치 중에선 가성비가 최악인 셈이다. 예전에는 장터에 나가면 할머니들이 하루종일 껍질을 벗겨 수고비도 받지 않고 팔았다지만 요즘 그런 행운을 바라면 바보 취급만 받을 것이다.

고구마줄기를 수확할 때마다 아내가 말리는 이유도 그래서다. 차라리 안 먹고 말지, 왜 그 고생을 사서 한대요? 사실 아내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요리를 전담하는 이유는 요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도 아니다. 번역, 강의, 집필 등, 내가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난 그중 밥상 차리는 일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고구마 껍질을 벗기지 않은들 그 시간에 딱히 무슨 대수로운 일을 하겠는가. 물멍하듯, 불멍하듯, 고구마줄기멍(?)을 하다 보면 그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다. 게다가 가을이 주는 이 특별한 맛을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결국 요리란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다. 남자들, 자기들이 하는 일은 가치 있고 여자들 일은 죄다 하찮다고 여기는 세상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런 일을 억지로 떠넘기고 집에서 밥이나 하는 여자라고 천대까지 하니 말이다.

껍질을 벗기고 나면 정작 김치 담그는 과정은 허무할만큼 간단하다. 배, 양파, 홍고추, 찬밥 등을 믹서기에 갈아 소스를 만든 다음, 고춧가루, 마늘, 액젓 등 양념을 섞은 뒤, 고구마줄기에 양파, 쪽파 따위를 더해 함께 비비면 그만이다. 자, 보라, 이 영롱한 빛깔을! 고구마줄기 특유의 알싸한 맛 또한 일품이니 어이 수고를 마다할 일이겠는가.

아내가 퇴근 후 밥상을 보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마디 한다. “에고, 기어이 따더니 이거 벗기느라 고생깨나 하셨네.” 그리고 자리에 앉아 한 젓갈 맛을 보며 이렇게 덧붙인다. “흠, 맛은 있네.” 

조영학/ 번역가,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저자
조영학/ 번역가,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저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