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발언] 영국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유창선의 발언] 영국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 유창선 시사평론가
  • 승인 2022.09.19 08:24
  • 수정 2022-09-20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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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AP/뉴시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5일(현지시각) 런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플래티넘 주빌리 카니발에 모인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런던=AP/뉴시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5일(현지시각) 런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플래티넘 주빌리 카니발에 모인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나의 생이 짧든 길든 평생을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위대한 황실에 헌신할 것임을 선언한다.” 70년전 21세 나이로 여왕에 즉위하면서 엘리자베스 2세가 했던 말이다. 그녀의 생은 길었고 ‘봉사와 헌신’의 시간 또한 그만큼 길었다.

21세기에 왕정이 유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하다. 어머니와는 또 다른 찰스 3세가 영국의 왕정을 제대로 계승할지에 대한 우려도 작지않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남긴 공적은 무척 크다. 엘리자베스 2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여왕이었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에서 국왕은 형식적인 국가 수장일 뿐, 헌법에 따른 실질적인 수장은 총리이다. 그럼에도 지난 70년간 엘리자베스 2세의 영향력은 작지 않았다. 여왕은 통치할 권력은 없지만, 여왕이 있는 한 어떤 총리도 1인자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보수 정치인이었던 7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은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독재를 더 어렵게 만들고 군사 쿠데타를 더 어렵게 만들며 칙령으로 통치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여왕이 존재하고 따라서 정당한 절차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왕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했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봉사자의 입장에서 국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왕은 권력이 아니라 봉사와 시민 정신에 따라 자기 의무를 다함으로써 공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엘리자베스 2세를 가리켜 "불안한 세계 속의 단결의 상징이며, 한마디로 최상의 영국인이다”라고 했던 것도 그렇게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마음의 여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영국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 전기 작가 샐리 베덜 스미스는 『퀸 엘리자베스』에서는 그녀의 리더십을 ‘겸손의 리더십’이라고 정의한다. 그녀가 국민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었던 비밀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국민을 높이는 ‘겸손의 리더십’에 있었다는 것이다. 왕정을 반민주적이고 후진적으로 보는 논란들이 있었지만, 격동의 시기에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여왕의 듬직하고 일관된 존재가 그것을 압도했다.

물론 엘리자베스 2세가 언제나 칭송과 찬사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노동당 계열이나 공화주의자들은 종종 왕실의 비용을 문제삼기도 하고, 여왕이 왜 면세 혜택을 받아야 하느냐며 여왕의 개인 수입의 규모를 밝힐 것을 요구하곤 했다. 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었을 때, 슬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정한 태도를 보인 여왕은 언론으로부터 ‘감정없는 괴물’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서거 이후 여왕의 업적을 기리는 서방과는 달리,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던 국가들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과오와 책임을 묻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업적에 대한 다양한 의견에 상관없이,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맡았던 영국에서 그녀가 갈등을 완충시키고 국민을 통합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에 관여하는 대신,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여왕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한 대결만이 반복되는 우리 정치를 보노라면, 통합을 이끌 그런 어른다운 리더십이 부재한 우리 현실이 더욱 모자라게 느껴진다.

영화 <더 퀸>에서 엘리자베스 2세역을 맡았던 헬렌 미렌은 오스카상에서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두 발로 굳게 땅을 디디고, 모자는 머리 위에, 핸드백은 팔에 걸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폭풍우를 견뎌왔습니다. 나는 그녀의 용기와 일관됨에 경의를 보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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