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폭력 딛고 나아가는 여성들을 그리다
혐오·폭력 딛고 나아가는 여성들을 그리다
  • 이세아 기자
  • 승인 2022.09.17 12:42
  • 수정 2022-09-20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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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022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 수상자 김정은 감독
올해 개봉한 첫 단편 ‘경아의 딸’서
디지털 성범죄 이후의 삶 그려 호평
“앞으로도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마음
영화로 다루겠다”
‘2022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은 김정은 영화감독을 7일 서울 마포구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2022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은 김정은 영화감독을 7일 서울 마포구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올해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 수상자, 김정은 감독은 ‘충무로의 눈부신 미래’로 불린다. ‘경아의 딸’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왓챠가 주목한 장편’, ‘CGV아트하우스상 배급지원상’ 등 2관왕을 차지했고, 일본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에도 선정됐다. 단편 ‘우리가 택한 이 별’(2015)을 시작으로 서울독립영화제, 청룡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 런던한국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경아의 딸’은 김정은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여성폭력이라는 까다로운 소재를 택했다. 김정영, 하윤경 두 주연배우가 각각 가정폭력을 겪은 어머니, 디지털 성범죄를 겪은 딸로 분한다. 피해자의 회복, 여성연대의 장면을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았다.

피해자는 일상으로, 가해자는 감옥으로 가지만 통쾌한 ‘사이다’ 서사는 아니다. 상처는 깊고, 정의는 오롯이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성들은 나아간다’는 희망을 말하는 영화다.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포스터. ⓒ㈜인디스토리 제공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포스터. ⓒ㈜인디스토리 제공

2018년의 기억들이 영화의 씨앗이 됐다. ‘혜화역 시위’, ‘미투 운동’ 등을 기점으로 여성폭력이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고, 페미니즘 운동이 곳곳에서 변화의 물꼬를 트던 시기다. 많은 또래 여성들처럼 김정은 감독도 자연스레 페미니스트로 ‘각성’했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저처럼 보수적인 성교육을 받고 자란 여성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더 컸죠. 당시 많은 방송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다뤘는데, 피해자를 설명하는 방식이 너무 전형적이었어요. 고통 속에서 사는 모습이 다가 아닌데도요.”

폭력 이후의 삶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을 만나 자문을 얻고, 취재 내용을 기초로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는 폭력의 재현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한다. 성관계 장면, 적나라한 노출 등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현실의 폭력을 다루는 일은 어떻게 보면 영화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폭력을 재현하는 것과 폭력 자체의 스펙터클을 목표로 재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죠.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이 최근 늘었어요. 폭력의 희생자는 항상 여성이고요.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대상화되고 극에서 금세 사라져 버리죠.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김정은 감독은 “피해자들이 영화를 보고 상처받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여성 감독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인지감수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없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제 부족한 지점을 많이 채워 준 배우, 스태프, 동료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도 했다.

“어머니 ‘경아’가 딸 ‘연수’의 피해촬영물을 처음 보는 장면에서 연수가 남자친구와 단둘이 침대에 있는 모습이 잠깐 나오고, 이어서 (성관계를 암시하는) 소리가 들려요. 스태프들이 ‘소리도 나오면 안 된다’고 했어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어요. 반성했어요.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고 고민 끝에 그대로 뒀지만, 저도 더 공부하고 노력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귀담아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윤경 배우는 이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 성평등에 공헌한 ‘2022 벡델리안’으로 선정됐다. 김정영 배우는 “‘이제 또 어떤 배우가 되어볼까?’ 그런 생각을 본의 아니게 계속 하게 만”드는 “고마운 작품”이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감독 자신에게도 위안이 됐다. “왜 여성의 ‘성’은 숨기고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엄마도 여성으로 살면서 혐오와 차별을 겪었을 텐데, 왜 딸에게 그런 가치관을 고스란히 전할까?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화가 나기도 안타깝기도 했어요. 딸은 물론, 자기 삶을 살지 못했던 엄마도 독립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영화에 담고 싶었어요.”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김정은 감독의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김정은 감독의 영화 ‘야간근무’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김정은 감독의 영화 ‘야간근무’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김정은 감독의 영화 ‘막달레나 기도’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김정은 감독의 영화 ‘막달레나 기도’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앞서 김정은 감독은 춘천에서 홀로 사는 노인 정숙의 하루를 다룬 ‘막달레나 기도’(2018), 공장에서 야간근무를 함께 하며 우정을 쌓아간 두 여성의 이야기 ‘야간근무’(2017)를 만들었다.

“제 영화에는 항상 소수자, 여성, 사회 문제가 등장해요. 지금 제가 가장 관심 있게 보는 문제들, 제 경험이 자연스럽게 영화로 이어져요. ‘막달레나 기도’는 제 할머니에 관한 영화고, ‘야간근무’는 졸업작품 후반 작업 비용을 마련하려고 야간 공장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영화예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이 영향을 주고받고, 성숙해 나가는 관계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왔고요.”

페미니즘 관점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다룬 영화가 나올 때마다 반발이 만만찮다.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영화 ‘걸캅스’(감독 정다원), 노년 여성이 겪은 성폭력을 다룬 ‘69세’(감독 임선애) 등은 개봉 전부터 ‘평점 테러’ 공격을 받았다. 김정은 감독도, 주변인들도 ‘경아의 딸’ 개봉을 앞두고 우려했던 문제다.

“그래도 저는 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했어요. 흔들린 적 없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얘기고요. 영화 자체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다뤘다고 무조건 비난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가족들은 그의 든든한 조력자다. 친오빠와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여러 의견을 나눴고, 어머니도 “영화 잘 봤다”며 응원을 보냈다.

최근 김정은 감독은 인천 남구의 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에서 학생들,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화 교육을 하고 있다. 대학 영화과 동문들과 의기투합해 만든 제작사 ‘주마등필름’도 계속 운영할 예정이다.

차기작은 캐스팅을 소재로 한 영화다. 2023년 초까지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게 목표다. 김정은 감독은 “앞으로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폭넓게 담아낸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다시 정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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