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사·재산 평등상속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이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야만시대 인류는 집단혼으로 인해 모계만이 확인 가능했기 때문에 모계제 사회를 이루었고, 미개사회가 되면서 배우자가 고정되는 대우혼으로 대체되었지만, 아직은 모계 씨족사회로서 재산은 남자의 여자 형제 후계자에게로 상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BC 2000년경 약탈과 투쟁의 역사가 본격화되고 연맹국가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성중심의 위계질서가 형성됐다고 말한다.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임신과 육아의 부담을 짊어져야 했던 여성들은 새로운 사회 변화에 참여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결혼을 통해 특권과 지위를 유지·확대해 나간 경우엔 여자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우리 역사 속 고려시대가 바로 그런 경우.

고려시대 여자들은 호주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여자도 분가할 수 있고, 호족이나 족보에 기록할 때도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적었다. 가령 고려시대 호적에는 남편이 죽고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또 고려시대에는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외손자가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적장자에게 제사를 계승하지 않았고, 주로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형제·자매들이 돌아가면서 돈을 내어 불사를 주관했다. 이처럼 부계와 모계를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요시한다는 차원에서 전문가들은 고려시대를 '양측적 친족사회'라고도 부른다.

고려시대에는 결혼식을 처가에서 한 뒤에, 결혼 후에도 일정기간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겉보리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 '출가외인' 등은 모두 성리학이 보급된 조선시대에 나온 말이다. 고려시대 결혼제도를 '솔서제'라고 하는데, 이는 부모로부터 받는 상속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처럼 부계 위주로 상속이 이뤄진다면 자연히 결혼도 남자 집으로 들어가는 형태를 취하겠지만, 고려는 친족구조가 비(非)부계적이었고, 상속은 여자와 남자에게 동일하게 상속되었다. 게다가 딸의 상속분은 결혼 후에도 남편 재산으로 흡수되지 않고 자기 몫으로 남아 있으며, 결혼한 여자의 노비는 그녀가 자손이 없이 죽었을 경우 일단은 남편이 소유했다가 친정의 자손에게 돌려줘야 했다.

자료·<우리 여성의 역사>(청년사, 한국여성연구소 여성사연구실)

조유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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