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지난주에는 아주 오랫동안, 햇수로 치면 무려 4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창들을 만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녔지만 금방 군대에 들어가는 바람에 단 1년밖에 함께 공부하지 못했던 남자 동창을 만났는데 그 동안 폴란드에서 사업을 하느라 소식이 끊겼다.

또 한 번은 비교적 가까운 고등학교 친구의 딸 결혼식에서였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데다 빈 깡통소리만 요란한 나하고는 달리 굉장히 조신하게 산 친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여고동창들 수십 명이 몰려와서 깜짝 놀랐다. 그 수십 명 중에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친구가 절반을 넘었다.

서로 행동반경이 다른 탓에 그 동안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졌던 젊은(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예순이 다되어 만나게 되니 새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게 되어 감회가 남달랐던 며칠이었다.

대학동창은 이름만 기억될 뿐 도대체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길거리에서 만나도 그냥 지나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지 오래 전에 같은 과를 1년 함께 다녔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모임을 갖는 일이 잘하는 짓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만나는 순간 어느 새 나이 든 얼굴 위로 스무 살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우리의 입에서는 마치 새내기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나, 하나도 안 변했네. 옛날 모습 그대로야.”

40년 이어주는 세월의 힘

우리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남녀간에 내외가 심하던 시절이라 같은 학년이라도 서로 존대말을 쓰고 만나면 늘 서먹서먹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 만큼 들어 만나니 놀랍게도 순식간에 친밀감이 서로를 감쌌다. 40년의 간격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 기간 동안 어지러웠던 마음들이 깨끗이 씻겨 순수함만으로 만남을 즐기게 된 것 같았다. 이런 것이 바로 세월의 힘일까.

그 친구도 이번 만남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면서 정말 만나길 잘했다고 감격했다. 그 전에는 한국에 와도 그냥 일만 마치고 조용히 떠났다고 했다. 대학 때도 그저 그랬는데 이제 와서 만난다고 무슨 재밀까 싶었단다.

우리는 영원한 인생동창

우리는 앞으로 동유럽 여행을 떠날 때마다 폴란드에 들르기로 하고 일어섰지만 헤어짐이 아쉬워 거리에서도 한참 동안을 서성거렸다.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껴 있던 벽은 스르르 무너지고 같은 시기를 열심히 달려온 인생동창으로서 연대감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여고 동창들은 거의 다 전업주부라고 했다. 이 나이까지 살자면 때로는 힘든 일들이 왜 없었으랴만 지금은 모두 편안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매스컴에 얼굴이 팔린 덕분에 나 어떻게 사는 건 다들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약간은 민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만큼 친근하게 여기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원탁에 둘러앉아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아득한 여고시절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의 옛날 모습이 하나하나씩 떠올랐다. 그 중에는 뛰어난 글솜씨로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후배들의 경탄을 자아냈던 친구도 있었고 천재적인 두뇌로 탁월한 학자가 되리라 믿었던 친구도 있었다. 그런 귀한 능력들을 다 묻어둔 채 어떻게 얌전하게 전업주부로 살아 왔는지 참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 동창들 중에는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꽤 있지만 고등학교 때 두각을 나타냈던 친구들 대부분이 전업주부가 되었다. 한때는 여자들이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애초부터 현모양처를 선택한 그들이 잘했다 싶은 적도 있었지만 이쯤에서 돌이켜 보니 참 아깝다는 생각이 한결 강해진다.

하지만 각자가 어떻게 살아왔던 이제 무슨 대수랴. 상대의 얼굴에서 나의 나이듦을 확인하는 우리는 같은 시간의 물결을 탄 영원한 동창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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