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모든 생명에 연민을 가진 여성의 시선으로
[인터뷰] 모든 생명에 연민을 가진 여성의 시선으로
  • 두경아 작가
  • 승인 2021.09.18 09:00
  • 수정 2021-09-19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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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문화상 수상자 릴레이 인터뷰]
2020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수상자 - 정정엽 화가
ⓒ정정엽 작가 제공
정정엽 작가 ⓒ여성신문
정정엽, 조용한 소란, 서울식물원, 2021 ⓒ정정엽 작가 제공
정정엽, 조용한 소란, 서울식물원, 2021 ⓒ정정엽 작가 제공
정정엽, 조용한 소란, 서울식물원, 2021 ⓒ정정엽 작가 제공
정정엽, 조용한 소란, 서울식물원, 2021 ⓒ정정엽 작가 제공

팥과 콩, 나물과 싹튼 감자, 벌레와 나방, 봄나물 등이 캔버스 위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정정엽 작가는 이들의 생명력을 지나치지 않고 포착해 작품으로 담아냈다. 그는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들을 작업의 주제로 삼아온 작가다. 1980년대부터 여성주의, 생태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회화, 설치,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1985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한 후 1995년 이십일세기 화랑에서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을 시작으로 2000년 ‘봇물’, 2001년 ‘낯선 생명’, ‘그 생명의 두께’, 2009년 ‘얼굴 풍경’, ‘Red Bean’, 2014년 ‘길을 찾는 그림, 길들여지지 않는 삶’, 2011년 ‘Off Bean’ 등 개인전을 열었다. 반복 노동 뒤에 숨겨진 여성의 시선을 담은 ‘곡식’ 연작과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한 ‘최초의 만찬’ 연작 등이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그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여성의 노동과 일상에 천착해 억압받는 여성의 형상과 정동을 담아내온 액티비스트이자 화가’ 등으로 불린다. 그는 1980년대 ‘두렁’, ‘갯꽃’ 등 노동 현장의 미술 소모임 운동에 뛰어들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여성미술연구회’의 일원으로 현장운동과 여성주의 미술을 매개한 주역이었다. 1994년 ‘여성미술연구회’가 공식 해산한 이후, 그는 자신만의 회화적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00년부터는 ‘입김’이라는 여성작가 콜렉티브를 결성해 페미니즘 행동주의와 예술공동체의 수행적 지평을 열기도 했다.

코로나19 시기에도 많은 전시를 열었다. 2021년 7월 남북 합의 이행을 염원하는 남북 미술 기획전 ‘약속’에 참가했다. 4월부터 10월까지 서울 식물원에서 ‘조용한 소란’ 전을 열고 작품 45점을 선보였다. 8월부터 10월까지 파주 헤이리 아트센터 화이트블록에서 그의 20번째 개인전 ‘걷는 달’이 열렸다. 동시대를 살면서 교감해온 여성의 초상을 중심으로 한 작업을 선보였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 작가를 이메일을 통해 만났다.

- 남북 미술 기획전 ‘약속’에 참여했다. ‘마을 넘어’는 노을처럼 붉은색이 아련함과 그리움을 자아낸다. 어떤 영감을 바탕으로 작업했나.

“‘마을 넘어’는 붉은 팥으로 대지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백록담을 그린 작품, 오색콩의 ‘축제’라는 작품도 출품했습니다. 남북교류전 때 ‘조금 일상적인 정서를 만날 수는 없을까’ 생각하다가 곡식이 떠올랐습니다. 남과 북은 곡식의 공동체이기도 하니까요. 혹시 북한 주민들은 나의 콩 작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매우 궁금합니다.”

- 식물원에서 연 ‘조용한 소란’ 전시는 어떻게 마련됐나?

“처음 서울식물원에서 제 전시를 구상할 때 봄나물 시리즈를 염두에 뒀다고 합니다. 큐레이터가 작업실을 방문한 후 생각이 달라졌지요. 팥, 녹두, 촛불 콩, 나방시리즈, 감자 싹,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김혜순 시)’의 거울 설치작업까지 안 어울리는 것이 없다고 해서 전시장 두 곳에 45점을 출품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식물들과 저의 일상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한 생명의 이면에서 또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20번째 개인전 ‘걷는 달’도 열리고 있다.

“여성을 주제로 한 개인전이에요. 마음속에 품은 달을 꺼내듯 여성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동료 작가와 활동가, 신문이나 책을 통해 공감하게 된 여성의 이야기, 우연히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까지 다양한 여성의 초상이에요.

정 작가는 ‘조용한 소란’ 전에서 가장 추천하는 작품으로 ‘감자 싹’ 시리즈를 꼽았다. 그는 “냉장고의 채소 칸에서 썩어가는 감자를 보고 그 작품을 떠올렸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은 내가 먹는 것들, 발견한 식물들이 어디로부터 발생하는지 생각하고 또 그 이면의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 언제부터 곡식, 나물, 여성, 곤충 등에 관심을 갖게 됐나.

“여성적인 주제나 소재는 없다고 봐요. 단지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거죠. 여성주의 미술을 고민하면서 살림을 다시 보고, 보이지 않던 여성의 노동을 보게 됐어요. 여성의 눈으로 아름다움은 무엇이고, 내 삶의 근거를 이루는 미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내 삶에서 나오는 무엇, 밀착된 언어를 발견하고 싶었어요. 여성 미술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린 게 여성 미술이 되길 원했습니다. 여성의 시선엔 모든 생명에 연민을 갖는 마음이 있다고 봅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보이는 거죠.”

-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순하고 숫기 없고 느리고 겁 많고 마음 약한 어린이였습니다.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어 언젠가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홀로 보낸 시간이 길었는데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는 혼자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었어요. 고등학교가 인사동과 가까워 자주 전시를 보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여러 의문이 생겼죠. 미술이 삶과 괴리된 느낌, 특정 학교와 형식이 지배적인 구조, 미술 안에 여성의 삶이 보이지 않는 것, 소수의 여성작가 등…. 그 질문을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가장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인가?

“저는 여성미술연구회, 두렁, 입김 등 동료작가들과도 함께 많은 작업을 했어요. 신랄한 비판과 묵언의 격려가 큰 힘이 됐지요. 남들이 앞에서 해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직접 나눌 수 있기에 친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떠한 비판도 흔쾌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그들의 감각, 내게 없는 창의성, 의외성 등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질투심보다 자극으로 기쁘게 받아들였죠.”

정 작가는 30년 가까이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 성실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직장인처럼 주 5일, 하루 8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그 이유에 대해서 “여성의 일은 뒷전으로 밀리기 쉽고 더구나 예술 활동은 당면 과제가 아닌 일로 치부되기 쉽다”면서, “직업인으로 저의 시간을 침해받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작품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궁금하다.

“‘혼술’도 하고 도망도 가고 산책도 하지요. 별수 없이 작업 앞에 서서 지지고 볶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최초의 마음, 꼭 해야 하는 이야기를 붙들고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작가는 타인의 시선과 성과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만의 시간표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언제나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정엽, 벽 앞의 웃음,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62X130cm ⓒ정정엽 작가 제공
정정엽, 벽 앞의 웃음,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62X130cm ⓒ정정엽 작가 제공
정정엽, 최초의 만찬 2, 2019, oil, acrylic on canvas, 50x100cm ⓒ정정엽 작가 제공
정정엽, 최초의 만찬 2, 2019, oil, acrylic on canvas, 50x100cm ⓒ정정엽 작가 제공

정 작가는 2020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상 시상식에서 “처음 수상자로 뽑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제가 만난 NGO, 여성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존경하는 활동가들이 떠올랐다”며 “저는 선배가 없는 상황에서 선배의 덕을 못 보면서도 많은 사랑과 응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제가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열심히 응원과 지지를 하고 싶다”는 소감을 남겼다.

- 2020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은 어떤 의미였나.

“이 상은 전문성 외에 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 생각합니다. 총체적인 삶의 과정까지를 인정받았다는 뜻이어서 부끄럽기도 했고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헌신하는 여성들과 실무진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여성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고민을 인정했다는 의미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 시상식에서 만났던, 다른 시상자들에 대한 인상은.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다채롭고 창의적으로 삶을 일구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니 놀라웠습니다. 그런 분들을 찾아낸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사무국의 수고에도 감탄했지요. 특히 스포츠, 방송, 경제 등 거리가 느껴졌던 분야의 멋진 여성들에게 예술적 향취가 느껴졌습니다. ‘아~ 우리나라 안 망하겠구나’ 든든한 생각도 들더군요.”

- “여성주의 시각은 오히려 균형 잡힌 시선과 자유로움을 줬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어떤 남성 작가가 저한테 “정정엽 씨는 페미니스트 중에서 균형 잡힌 것 같다”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원래 페미니즘은 균형 잡힌 거예요. 아니면 최소한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라고 했어요. 남성들은 페미니즘에 관해서 많이 공부해야 해요. 비판하려면 기존의 룰을 알아야 하고, 새로운 룰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공부해야 하고요. 요즘 서점에 페미니즘 책 매대가 따로 있을 만큼 뭐가 많은 것 같지만 남성들의 기록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 이 시대의 페미니즘은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금도 여성 작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부담감은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교육, 살림, 돌봄노동까지 결국 여성의 몫이니,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어요. 요새 젊은 여성 작가들이 미술계에 많이 등장하는 것은 미리 알아서 결혼을 안 하거나 늦췄기 때문이라고 봐요. 사회가 힘들어지면 구조의 문제를 왜곡해서 손쉽게 편 가르기로 페미니즘을 공격하기도 하죠. 그 압력까지 어려움은 여전합니다. 분노로 누군가를 적대시하는 건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고, 억압에 자신의 감각을 훼손당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기후변화 등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우리 눈앞에 있다고 봅니다. 모두의 결단이 필요한 때가 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개인전을 마치면 어디로 갈지 저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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