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편견을 버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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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크루거, 넌 너 자신이 아니다(You Are Not Yourself), 1982

다리 좀 벌리고 앉아 있지 마, 여자가 그게 뭐야? 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들어 왔고, 가끔 자연스럽게 아직도 사용한다. 근데 실상 그 다리를 떠억 하니 벌리고 앉아 있는 자세는 남자건 여자건 흉해 보일 때가 있다. 마치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 마냥 좁디좁은 지하철 안에서 두 다리를 터억 하니 버티고 있으면 옆사람만 불편할 뿐 아니라 앞에 서 있는 사람도 언짢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나라 남자들 중에는 일본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몸을 ! 웅크리고 신문을 몇겹 접어 읽고 있는 모습에 쪼존한… 운운한다. 이른바 대한의 남아는 어디서건 당당하게 두 다리를 터억 하니 벌리고 앉아야만 호연지기의 사나이로 인정받아 왔기에 그럴 수도 있다. 남성성의 전형이 삐딱하게 줄을 잘못 탄 경우이다.

다행히 한국 여성들은 '여자는 절대 다리를 벌리고 있으면 안 된다'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치마를 처음 입기 시작하는 서너 살 때부터 이미 받아온 터라서 상대적으로 훨씬 교양인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여자는 다리를 오므리고 있어야 하고 남자는 맘대로 앉아도 되는 거야?' 라는 질문을 당돌하게 하는 딸자식에게 뭐 딱히 설명할 말이 없다. '으응…팬티 보이거든!' '그럼 우리도 치마 안 입었을 때엔 다리 벌리고 있어도 돼?' '에이. 그럼 좀 흉하거든' '왜, 흉해?' 정말 할 말 없다. 여기에 생물학적으로 운운하면서 또 여러 가지 학설과 가설을 꺼내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한 마디로 억지 좀 그만 부리시죠, 이다.

이유는 뻔하다.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다는 것은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아가 여성의 성기는 성적 대상으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그 무엇이다. 즉 그녀는 소중한 자신의 성기를 담고 있는 두 다리를 최대한 다소곳하게 가리고 앉아 공연한 남성들의 호기심을 동하지 않게 하는 미덕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부계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며, 내 소유의 여성에게 다른 남자가 성적 호기심을 가진다는 일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이러이러해야 '제대로 된' 여성이다라는 어떤 전형을 끊임없이 강요해 왔다.

여자는 다리를 다소곳하게 오므리고 앉아야 하며 웃을 때 내장 안 보이게 입을 가려야 하며, 걸음걸이를 팔자로 하면 안 되고 등등의 외관적인 것뿐 아니라, 순종하고 인내하고 참아내야 한다는 성격개조까지 요구해왔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진정한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강요된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온 셈이다. 즉 넌 너 자신이 아니란 소리다.

바바라 크루거는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커져가던 8, 90년대의 적극적인 페미니스트 미술가다. 그녀는 이제껏 사회가 강요해온 여성의 전형성에 대해 특유의 기지로 저항한다. 여자가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공식은 서구 사회가 발달하면서 더욱 극명하게 그 모순을 드러내 보였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제껏 여성들을 질식시켜 왔는지를 고발하고 스스로 반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관료적이고 고압적이며 고매함으로 무장한 미술관의 마초이즘을 비웃듯 티셔츠에, 빌딩 광고판에, 버스 정류장 대기소 모퉁이, 쇼핑백 등의 대중적인 공간 곳곳에서 '억지춘향식 여성'의 전형성이란 압박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그려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들이여, 이젠 지하철에서 두 다리 짝 벌리고 앉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모든 문화인들이여, 당신이 남자건 여자건 비좁은 공간에서는 다리 좀 움츠리고 앉아 옆 사람 불쾌하게 하지 말자'라고 바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이제는 그냥,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라는 말이 '여자가 그럼 못써'라는 말보다 더 많이 사용되길 정말 바란다. 이런 글 읽고 벌컥 화내는 남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남자답지,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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