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말함으로써'나'를 인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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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서주희. 그녀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사진·민원기 기자>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s)>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막을 열어 새해 1월 18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펼쳐진다(02-764-8760∼1).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극작가, 시인인 이브 엔슬러가 200여 명의 여성과 성(性)에 관해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쓰여진 이 작품은 1996년 뉴욕에서 초연된 이래 전세계의 무대 위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2001년 예술의 전당에서 이혜경 연출로 초연됐으며 그해 겨울 서주희의 모노드라마로 재탄생했다.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ㅂ. ㅗ. ㅈ. ㅣ.'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함으로써 그동안 감춰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성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작품성으로도 인정받았다. 말 그대로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서주희. 개막을 앞두고 한창 연습중인 그를 성북동 연습장에서 만났다.

-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 당신은 각계각층, 다양한 연령의 여성이 '된다'.

짬지가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다섯 살 꼬마에서 첫사랑에 상처받고 자신을 저주해온 칠십대 노파까지. 평론가들을 비롯해서 많은 격찬을 받았는데 소감이 어떤가?

“누군가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보고 나서 “여러 명의 배우가 출연한 줄 알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배우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된다는 것은 배우의 목표다. 무대에 오르면 나는 인물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한다. 인물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고 그가 슬프면 나도 슬퍼진다. 그저 배우의 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같은 공연을 3년째 하고 있다. 연출가도 바뀌었다고 알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특별히 더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이번에는 대극장 공연이다. 혼자서 큰 무대를 이끌어나가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연출가를 비롯해 모든 스태프들이 새로운 사람들이다. 연출가가 남자인데 작업은 매우 흥미롭다. 남성의 눈으로 볼 때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들을 짚어내며 함께 토론했다. 우리는 이 작품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원한다.

첫번째 <버자이너 모놀로그>(2001년 11월 컬트홀 공연) 연출가 중 한 명도 남성이었다. 홍콩 남성인 와이킷 탕이 한국여성 이지나와 함께 연출을 했는데, 그는 상당히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문화적 충격(?) 때문에 연출가가 남성인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웃음) 중요한 것은 남녀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며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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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초연부터 크게 논란이 된 작품이다. 단순히 여성의 성기를 발음했다는 것뿐 아니라, 여성의 성과 신체, 나아가 여성의 존재를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이 크게 평가받았다. 참여한 배우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사회에서 하기 힘든 작업이었지만 배우 연출 모두 용감했다. 특히 관객들이 가장 용감했다.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관객들과 만났는데, 관객들이 막이 오르자마자 내가 'ㅂ. ㅗ. ㅈ. ㅣ.'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낼 때 충격을 받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금세 우리가 되고 하나가 되어 여성의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게 된다. 행복한 체험이었다.”

- 어떤 인터뷰에서 당신은 '작품을 끌고 가는 데 가장 힘든 관객은 연극의 주제를 여성운동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페미니스트들'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인가.

“언젠가 여성의 날 기념행사로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공연한 적이 있다. 거기서 내가 “이 작품의 제목을 우리말로 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관객들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ㅂ. ㅗ. ㅈ. ㅣ.의 독백!”이라고 외쳤다. 관객이 당황하는 장면인데 내가 당황했다. 그렇지만 “어떤 여성학 교재보다 탁월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다”던 한 여성학자의 말은 내게 큰 힘을 주었다.”

- 전투적 여성운동가가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정하게 되는 장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여성을 여성으로 깨닫게 한 남자친구의 성격도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 장면은 원작에는 없고 새롭게 만들어 넣은 부분이다. 여성이면서도 자신이 여성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남성인 척하는 여성을 빗댄 것이다.

나중에 남자친구가 “네 거잖아. 너를 소중하게 여겨야지”라고 말하는 그 대사는 원래 없었던 것인데 공연을 거듭해가면서 저절로 만들어졌다. 아마도 관객들과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튀어나온 것 같다. 이번 공연에선 빼야겠다. 중요한 건 여성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니까.”

- 당신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무대 위에서 당신이 보여준 여성들은 하나같이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주체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런 당신에게 '페미니스트'라는 칭호는 일종의 칭찬이 아닐까.

“과찬이다. 나는 그저 그 인물에 더 잘 표현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 연기했을 뿐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영화로 돌아설 생각은 없는가?

“좋은 작품만 있으면 영화도 앞으로 더 할 생각이다. 2001년 영화 <꽃섬>을 찍으면서 내가 해온 연극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새삼 깨달았다. 지금은 <레이디 맥베스>를 연출했던 이영란과 연극 <슬픈 구미호>를 준비중이다. 머지 않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최예정 기자shoo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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