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 할머니의 노래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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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 파! 한겨울 제주도의 까만 흙엔 초록 파가 숭숭 돋아났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구비문학을 전공한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다. 북제주군 구좌읍 동김녕리 민요 잘 부르는 애월 할머니 댁에 왔다.

다리를 절뚝이는 애월 할머니가 우릴 맞아준다. 우리는 안방에 녹음 장비를 풀고 애월 할머니 노래를 기다린다. 할머니는 끙끙대며 “노래는 못 불러” 하신다. 뭔가 석연찮은 일이 있나? 할머니와 선생님의 면담이 시작됐다. 곧이어 할머니는 노래를 시작한다. “바람은 간들간들 어헝어헝 어어 어야 어으엉 어으엉 사데로구나….” 밭 매는 소리다.

할머니는 한 소절 부르더니 “혼자는 못 불러” 하신다. 밭 매는 소리는 두 사람이 이중창으로 불러야 하는데 혼자 부르니 힘에 부친다는 거다. 할머니는 “우리 애들, 동네에 노래 잘하는 애들 부를 테니 같이 녹음하자”고 제안한다. 잠시 후 할머니 두 분이 찾아왔다.

“우리 애들이야. 인사해.”

애월 할머님도 참, 애들이라니! 우린 새로 온 두 할머니들과 맞절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드디어 본격적인 노래가 시작됐다.

“우리 부모 왜 날 낳아서… 가난하고 서난한 집에 시집 보내여… 이연고레골아그네에….” 고래 고는(맷돌질하는) 소리다.

“쳐라쳐라, 노를 잡고 한길 두길 물 속으로 들어가니 저승길이 분명하다…이어도 사나….”

노젓는 소리다. 제주 여인들은 일도 참 많이 했다. 말몰기, 밭갈기, 노젓기, 아이 재우고 방아 찧기, 해녀일…. 일마다 꼭 맞는 노동요를 지어 불렀다.

벌써 점심때다. 우린 할머니들과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점심을 해치우고 마당 곁을 서성이는데 선생님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할머님들이 노래값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해녀 일을 쉬고 노래하러 오셨기 때문에 해녀 하루 일당을 요구하셨다는 거다. 우린 할머니 집 담 너머로 보이는 검푸른 바다를 보며 어떻게 하면 할머니들 노랫값을 깎을 수 있을까 궁리했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노래 듣겠다고 온 우리에게 노랫값을 요구하는 할머니들. 야박하지 않은가? 근근이 공부하는 선생과 학생들 사정을 좀 봐줄 수 있지 않는가? 결국 우리는 할머니들에게 노랫값을 제대로 주는 대신 제주 민요를 확실히 채집해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하루 고용된 할머니들에게 뽑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뽑아내자! 실리적인 기업인들처럼 말이다. 우린 당당히 재녹음을 요구하며 늦게까지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노래를 불러달라고 졸랐다. 녹음은 아홉 시가 돼서야 끝났다.

우린 제주시내로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배춧잎이 둥둥 떠 있는 말간 갈치국, 쫄깃한 돔베고기, 톡 쏘는 자리돔 젓갈. '삼삼하다'라는 맛이 이런 맛이구나 싶다. 도마 위에 올려진 따뜻한 돔베 고기는 살살 녹는다. 돔베 고기를 쌈 싸먹으며 애월 할머니를 씹었다. 매정하다, 세 분 할머니들 중 노래를 제일 못 했다, 너무 돈, 돈 하는 거 아니냐 등등. 우리도 참 못났다. 늙어서 해녀 일을 못 놓고 계신 사연 많은 할머니 세분을 모셔다 놓고 종일 노래를 시켰으면 노랫값을 주는 게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노래값 이상의 학문적 자료도 얻었다.

그래도 불평불만인 거다. 우리끼리 제주도 별미를 요것저것 먹으면서! 우린 알 길이 없다. 주름 많은 몸에 검은 잠수복을 입고 검은 바다에 뛰어드는 제주 해녀 할머니들의 노동에 대한 시각과 생명력을 알 길이 없다. 그런 걸 조금 알고자 노동요를 채집하고 다녔건만 정작 해녀 할머니들의 노동의 대가는 무시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부끄럽다. 노래값을 주장하고 협상한 할머니들의 당당함에 부끄럽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일단 내 노래가 변변치 않다는 생각에 기죽었을 거고 야박하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노랫값 같은 건 생각지 못했을 거다. 나는 초록 파가 자라는 겨울의 제주도 해녀 할머니들에게 건강한 노래를 사가지고 왔다. 결심한다. 그 노래를 기죽을 때마다 들어봐야지, 꼭꼭 씹어먹어야지, 먹고 힘내야지, 누군가와 같이 즐겨야지, 내 노랫값은 당당하게 요구해야지!

경민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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