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인 나는 둥글둥글하고 뼈가 아주 굵은 데 비해, 뼈도 가늘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둘째 딸은 어릴 때부터 제 몸을 움직여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소심하게 방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좋아 음으로 양으로 부추기기까지 하면서 '여자가…' 운운하는 말을 들으며 기죽고 살지 않기를 바랐다.

수영을 오리발과 잠수까지 섭렵하고 6학년이 되더니 키가 큰 저희 반 남자애들은 이미 아빠 키보다 크다며 놀라던 아이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끼리 싸우는 모양을 몇 번 보았는지 어느 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어쩜 그렇게 인간이 인간을 팰 수가 있냐? 힘없는 남자애는 그냥 맞기만 하더라. 선생님도 못 말릴 정도인데, 나같이 비리비리한 여자애는 때리면 손도! 못 쓰고 그냥 죽겠더라고… 그러더니 어느 날 권투 도장을 보내 달라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평소 키가 작고 마른 제 몸에 콤플렉스가 있던 아이인지라 힘이라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한 모양이다. 너 혼자 알아봐라 도장이 어디 있는지, 월회비는 얼만지, 준비물은 무언지 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 후 드디어 다 알아놨다고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그러더니 저녁 해가 점점 짧아지는 어느 날, 저녁 늦게 돌아온 아이는 온 몸이 땀 범벅이었다. 훈련이 고된 모양인지 잠도 일찍 잤고, 밥도 잘 먹었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갔다.

우리 잡지에서도 여자 복서 챔피언 이인영을 만날까말까 하는 말들이 오가고, 서울대 여학생들 복서클럽이 챔피언을 먹었느니 하는 말들도 들려오곤 하던 어느 날, 이 애가 어떻게 권투를 하고 있나 궁금해 도장으로 따라 나섰다. 입구에는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뜬 반바지 차림의 권투선수들 사진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고, 땀 냄새와 남자 냄새와 지하실 냄새가 섞여 퀴퀴했다. 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소리가 3분 간격, 1분 간격으로 저 혼자 울리고 아이는 그 소리에 맞춰 러닝과 줄넘기를 쉼 없이 계속했다.

중간에 순수하게 옛 권투선수 모습을 한 남학생들이(헝그리 복서, 딱 그 느낌)들어와 쉭쉭, 쉭쉭 거친 숨소리와 힘찬 손길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 단계가 끝나자 건장한 코치가 다가와 아이에게 글러브를 끼게 하고 동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쨉, 훅, 라이트, 레프트, 피하기 등. 아이는 자세가 익지 않아 어설픈 데다가 힘도 없어 보여 운동이 아니라 마치 무용을 하는 것 같았다. 제 몸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샌드백을 치다가 샌드백이 되돌아오면 그 반동에 온 몸이 휘청거리는 그 우스운 모양이라니….

한 시간이 지나 땀에 젖은 아이를 데리고 나오며 관장에게 말을 걸었다. 이 아이가 잘하나요? 다른 여자는 없나요? 관장은 웃으며 말했다.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아요. 잘 가르쳐주세요. 이 애가 권투를 너무 좋아해요. 그의 뒷말은 좀 씁쓸했다.

아이구! 여자가 권투 좋아해서 뭐하게요? 권투 도장의 벽이란 벽은 몽땅 한국 여자의 매운 맛을 보여준 여성복서 이인영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건만 유일한 여자 고객인 아이에겐 도무지 관심도 없다. 이 애가 너무 마르고 힘이 없어 챔피언 복서로 키우기는 희망이 없을 수도 있다. 게다가 간혹 살이 많은 아줌마들이 다이어트 방편으로 권투를 배우러 온다는데 아이는 비포, 애프터로 사진을 찍어 권투를 선전할 만한 인물도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너는 왜 권투를 하느냐고 물었다. 처음엔 그냥 멋있어서 했지만 남자들한테도 지고 싶지 않았단다.

그리고! 아들도 없는 엄마가 혹시 아프면 업고 병원으로 가려면 더 힘이 세져야 한단다. 예전에 <우정의 무대>라는 프로그램에서 엄마를 번쩍 들고 업고 돌리는 아들들을 보고 '나는 누가 업어주나' 했던 말이 걸려 있던 모양이다.

하여튼 아이는 복잡한 마음으로 오늘도 죽어라 권투장으로 간다. 드라마 <때려>의 주제곡이 쿵쾅쿵쾅 울리는 그 곳에서 샌드백을 두들기고

있다(아니 샌드백이 애를 두들기나?). 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 나도 쉭쉭 주먹을 내지르며 뛰고 싶다.

권혁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장

<753호 필자인 조주은씨는 고려대학교 보건대학 여성학 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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