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등의 시선] ‘젠더 프리’는 자기 긍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나일등의 시선] ‘젠더 프리’는 자기 긍정으로부터 시작한다
  • 나일등 사회학자
  • 승인 2021.04.10 09:00
  • 수정 2021-04-09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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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등의 시선](끝)

 

나는 대학에서 사회조사실습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 수업에서는 대학생의 젠더 의식이라는 주제로 같은 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연애, 결혼, 사회제도에 관한 의견 등을 묻는 설문조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은 질문 문항을 만들고 면접 조사를 실시하고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해서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하는 작업을 1년에 걸쳐 실습한다.

조사 항목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는데, 젠더 의식이라는 큰 주제는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별역할분업의식을 묻는 질문은 매년 묻는 질문이다. 질문문은 다음과 같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에 어느 정도 찬성합니까?’ 응답 분포는 해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10~20% 정도의 응답자가 찬성 의견을 보인다.

수업의 마지막 회. 토론을 마치고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1년 동안 성실하게 수업에 임한 한 여학생이 말했다. “저도 무의식적으로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수업을 통해 그런 나 자신을 반성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젠더? “선 긋기 행위 자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학은 어떤 잣대를 갖고 조사 대상을 평가하는 학문이 아니에요. 평가는 절대로 내리면 안 돼요. 우선 이해를 해야 해요. 그리고 이 원칙은 남한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 자신에 대해서도 평가를 내리면 안 돼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태도도 20년의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이에요. 그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평가를 내리면 안돼요.”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책이 반쯤 섞인 말이었다. 착한 학생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젠더’란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된 성 차이라고 정의되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정의도 아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델피(Christine Delphy)에 의하면, 젠더란 선 긋기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렵게 말하면, ‘권력 관계에 의한 비대칭적 차이화’가 젠더다. 예를 들어, 너는 고추 안 달려있으니까 여자. 너는 자궁 없으니까 여자 아님. 나이 들었으니까 여자가 아니라 아줌마. 이런 식으로 집단 내에 자의적인 선을 그어 사람을 분류하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젠더화하는 행위다.

젠더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남녀의 성차’로만 이해하면 ‘여자도 남자처럼 하면’ 성차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영화 ‘G.I. Jane’(1997)의 주인공처럼 여자도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우면 남자와 평등해질 수 있다는 식이다. 아니면 반대로 남자가 주부(主夫)가 되어 ‘낮은 지위’로 내려오면 젠더 프리(gender-free)가 실현된다고 여기기도 한다. 

다양한 차이가 공존하는 세상 

그러나 젠더화라는 선 긋기 행위는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권력 관계의 틀을 가만히 두고 역할만 바꾸어 수행한다고 해서 젠더 프리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명예 남자’, ‘명예 여자’의 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젠더화에 의한 지배-피지배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젠더 프리의 진짜 의미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 역할밖에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차이가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성 역할을 맞바꾸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오히려 자신의 성별 역할 분업의식에 대해 반성하다 보면 자기 정체성에 상처를 내는 자해행위가 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소녀들이여(그리고 차이에 민감한 소년들이여)! 부디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그만두길 바란다. 젠더화된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이상한 선 긋기를 따라 하다가 몸과 마음에 상처 내는 일이 없기를. 나는 나, 너는 너.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자. 마음 속에 있는 불필요한 구분을 지우고 반대로 카테고리의 수를 하나하나씩 늘려가자. 작은 실천이지만 그런 실천들이 모이면 결국 사회도 변할 것이라고 믿기를. 물론 젠더 차별이 없는 세상이 금방 오지는 않을 테고 어쩌면 너희가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뭐 어때. 그런 로망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살겠어! :) 

*필자 나일등 :&nbsp; 일본 도쿄대학 사회학 박사로 센슈대학 사회학과 겸임 강사로 강단에 서고 있다. <br>『사회 조사의 데이터 클리닝』(2019)을 펴냈으며, 역서로는 『워킹 푸어』(2009),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2012)가 있다.
*필자 나일등 : 일본 도쿄대학 사회학 박사로 센슈대학 사회학과 겸임 강사로 강단에 서고 있다. 『사회 조사의 데이터 클리닝』(2019)을 펴냈으며, 역서로는 『워킹 푸어』(2009),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201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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