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샌프란시스코의 도산 안창호를 다시 생각한다
3.1절, 샌프란시스코의 도산 안창호를 다시 생각한다
  • 황은자(베로니카) H&C 교육컨설팅 대표
  • 승인 2021.03.01 11:14
  • 수정 2021-03-02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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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자의 K교육 클리닉]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독립기념관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망언 논란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밝혀졌다. 그 와중에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안 커디씨가 하바드대 총장에게 보낸 서신을 번역하고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고교시절 흥사단 웅변대회에 참가했던 정도로 기억하고 있던 도산선생이 새삼 생생한 인물로 느껴졌다. “교육을 통해 계몽하고 조선인이 깨인 마음으로 함께 이겨나가야 한다”고 했던 안창호 선생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리는 요즘이다. 이번 3.1절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봤다. 

LA 코리아타운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 ⓒ한국학중앙연구원
LA 코리아타운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과 의식변화로 독립의 길로 가자

샌프란시스코는 지금부터 118년 전인 1902년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가 한국인 부부로는 첫번째로 미국에 도착한 곳이다. LA 코리아타운에는 ‘도산 안창호 우체국'과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가 있다.

안창호 선생은 봉건적 사회제도와 가족 속에서 성장했으나 16세 때 청일전쟁이 조선 땅에서 일어나 파괴된 평양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스스로 나라를 구해야 겠다는 결심을 한다. 가족의 만류을 뿌리치고 상경해 구세학당에서 신학문을 접하고, 기독교에 입교해 기독교 교리를 통해 만민평등주의와 유길준의 영향을 받는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단순한 서양세계 소개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 ‘실상개화’로 문명국으로 가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안창호는 서양에 가서 ‘교육학’ 박사까지 공부하고 연구하여 귀국해서 조국 대한을 서양 열강처럼 자주독립하고 부강한 문명국가로 만들려고 결심했다.

도산은 교육에 미래의 희망을 건 교육자였다. 구세학당에서의 신학문과 조교생활 경험은 21세에 평양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사립 남녀공학 초등학교인 ‘점진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대성학교(1908년), 그리고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1926년)은 물론 이후 조선의 선각자들이 학교설립운동에 나서는 데 영향을 줬다.

그는 독립은, 엘리트나 지도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 하나 하나가 변화되어 일본에 항거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교육을 통한 의식변화가 도탄과 식민통치에 빠진 한국을 독립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도산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가들이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거나 ‘이화여전'과 ‘근화여학교' 재단의 재정 후원에 참여했다. 이는 지금의 교육한국이 되는 기반을 마련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도산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라는 4대 정신을 강조하고, ‘스스로 힘을 키울 수 있을 때만이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실력양성론’은 개인의 사리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했으며, 이를 통해 민족,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을 꿈꿨다.

1925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촬영한 안창호 선생 가족 사진. ⓒ독립기념관
1925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촬영한 안창호 선생 가족 사진. ⓒ독립기념관

언행일치의 롤 모델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갖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특히 1800년대 말~1900년대 초반을 살았던 안창호 선생은 봉건적 가부장제에서 성장하고 36년의 결혼 생활 중 23년을 가족과 떨어져서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며 지내야 했다. 도산의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상해에서 도산을 유혹하기 위해 신여성이 몰래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도산은 그 여성에게 “불을 켜라. 너의 그 열정을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라”고 타일러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도산 선생의 성실한 생활과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남성들에게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불문률을 적용하고 오히려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당시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흑인 인권운동가로 존경받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권운동에 헌신하는 와중에 부인과 자식들이 있음에도 신여성과 따로 살림을 차려 이중생활을 했던 것과도 대비된다..

이러한 강한 실천력은 도산이 강조했던 ‘참(Justness)의 인격', ‘거짓망국론’에서 기인됐다고 본다. 일본 강점기 치하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조선인들이 거짓말, 사기, 부정을 일삼으며 불신이 만연돼 있을 때, 이대로 가면 거짓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도산 선생은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강조하며 ’참 인격’을 강조했다. 스스로 실천했다는 점에서 더욱 존경스럽다.

샌프란시스코 동포사회 계몽과 한인친목회 결성

도산의 교육에 대한 신념은 미국 유학생활 첫날부터 재외동포 한인들의 의식계몽 활동으로 이어졌다. 교육학박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온 도산이 본 당시 한국 동포들의 생활은 정직하지 못하고 불결해서 부끄러운 상태였다. 인삼장수들은 중국 인삼을 ‘고려인삼’이라고 속여 팔고, 행상구역 침범으로 싸우기 일쑤였고, 상투를 붙들고 싸우는 광경은 미국인들의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도산은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무시할 것 같아 부끄러웠다. 동포들에게 정직하고 예의바른 문화생활, 인삼장수들에게는 행상구역과 판매가격 협정으로 이익을 보장하게 하고, ‘계’를 조직해 협동체제를 갖추도록 지도했다. 예의와 윤리, 책임감을 갖춘 시민교육을 한 셈이다.

안창호 부부는 샌프란시스코 한국인 거주지역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부인 이혜련은 생계를 위해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도산은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와 계몽활동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거주 1년만에 동포들과 미국인 임대인의 신임으로 무료 건물사용을 허락받았다. 거기서 최초의 미주 ‘한인친목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결집을 통해 독립의식 고취와 교육에 힘썼다. 그의 언행일치 모습은 동포들에게 신뢰받고 존경받는 근간이 되었고 동포들이 의지하는 지도자였다.

대한여자애국단 단체 사진. 사진=전남대 제공
대한여자애국단 단체 사진. 사진=전남대 제공

대한여자애국단 창단 권고한 여권주의자

1919년 3.1운동 소식에 영향을 받아 도산은 부인 이혜련에게 ‘대한여자애국단' 창단을 권유했다. 이는 그의 만민평등의식이 남여평등의식으로 발전됐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최초의 사립 남녀공학 초등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유교전통에 따른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하게 활동하는 여성상을 제시하는 여권주의자였다.

그해 8월 5일에 캘리포니아의 주요도시의 여성단체, 즉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다뉴바의 ‘신한부인회', 엘에이의 ‘부인친애회를 통합해 ‘대한여자애국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210마일 떨어진 농장지대인 다뉴바에서 창단된다. “가정의 일용품을 절약해 독립운동 후원금을 마련하고, 국내 동포 구제사업, 일본제품 배척, 부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독립운동 재정지원확보에 집중했다. 임시정부지원, 독립신문 후원, 광복군 후원, 구미위원부 선전비,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간도동포 기근구제금, 충무공유적보존회 후원, 중국군사위로금, 중국난민 구제, 적십자운동 등을 전개했다. 단원들은 월수입의 1/20을 회비로 냈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4만 6천달러를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도산선생부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캘리포니아주 전역과 멕시고, 쿠바 등 11개 지부를 두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성이 앞장서 자녀에게 역사교육을 하고 한인사회 계몽에 나선 활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단원 중 차경신은 국내에서는 부인회, 간호대, 청년단 조직 활동,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미국에서는 한국어학교 초대회장, 대한애국부인회 총단장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도산선생의 국민회와 흥사단 활동도 겸하는 등 열렬한 면모를 보였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도산 안창호

운전을 하며 가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현대자동차, 기아차, 혹은 코스코에서 LG나 삼성 전자제품을 지나칠 때는 한번 더 바라본다. 스낵코너에 진열된 밥풀과자나 김치라면 등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조금씩 자라게 해준다. 더욱이 LA 한인타운에 있는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라고 씌어진 곳에 들어가 편지를 부친다거나 LA 도심의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Dosan Ahn Chang Ho Memorial Interchange)’라는 표지판이 걸린 도로를 달린다고 생각해보라.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2018년 11월 9일 캘리포니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포되어 도산 선생을 기리고 있다. 도산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황은자(베로니카)
황은자(베로니카) H&C 교육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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