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려도 뿌리뽑히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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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조반니> 1막에서 돈 조반니를 상대로 싸우는 나머지 주인공들. 앞줄 왼쪽부터 엘비라, 안나, 체를리나. 뒤는 마제토 및 안나의 약혼자 오타비오. 1996년 코펜하겐 공연. ▶

유럽에서 4백년의 역사를 일구어온 오페라 작품들에는 각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더불어 여성의 지위와 삶의 조건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려고한다. 누가 그 재밌는 일을 해낼거냐고? 음악칼럼리스트 이용숙씨. 사진으로 보아 알겠지만 깜찍 예쁨의 극치다. 넙치로 유명한 귄터 그라스에 관한 논문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박사학위 취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편집자 주>

스페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귀족 돈 후안(Don Juan) 소재를 이탈리아어 오페라로 만드느라 이름 표기만 바꾼 것이 바로 돈 조반니.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787년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이 오페라가 초연되었을 무렵, 유럽에서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민중의 갈망이 뜨거웠고, 봉건적인 신분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이 오페라는 크게 인기를 끌었다.

모차르트의 히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대본가였던 로렌초 다 폰테가 다시 펜을 잡은 <돈 조반니>에는 희대의 난봉꾼 돈 조반니와 몹시 웃기는 하인 레포렐로, 돈 조반니 손에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쫓아다니는 귀족 처녀 안나와 그 약혼자, 돈 조반니와 결혼까지 했다가 그가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세상 끝까지 그를 찾으러 다니는 부르주아 여성 엘비라, 농부인 마제토와 결혼하는 날 돈 조반니의 유혹에 빠져 흔들리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골 처녀 체를리나 등 각각 귀족-부르주아-서민 계급에 속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계급적 특성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이 등장인물 중 세 명의 여성은 각자 뚜렷이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 타이틀 롤을 맡은 남자주인공보다도 더욱 관심을 끄는데, 특히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는 체를리나는 18세기 유럽 하층민 여성의 생존전략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예가 된다.

'거기서 그대의 손을 잡고'라는 아름다운 이중창에서 돈 조반니는 체를리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농부와 결혼해 평생 고생하고 살 수는 없다”면서 남편 마제토를 버리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체를리나를 유혹한다. 망설이는 체를리나에게 “네 신분을 바꿔 주지”라는 말로 결정타를 날리는 돈 조반니.

그러나 막 넘어가려는 체를리나 앞에 나타난 복수의 화신 엘비라는 돈 조반니의 정체를 밝히며 체를리나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귀부인이 된다는 꿈에 잠시 들떴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체를리나는 이제 남편 마제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할 형편.

결혼잔치중에 돈 조반니를 따라 나간 자신 때문에 남편이 배신감과 자격지심으로 퉁퉁 부어 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화가 났다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날 때려요. 순한 양 같이 얌전하게 서서 때리는 대로 다 맞을게요. 당신이 내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고 내 눈알을 뽑아내도 난 기뻐하며 당신 손에 입맞출 거예요…우리는 즐겁고 행복하게 평생을 헤쳐가야 할 부부잖아요….”

'날 때려줘요, 사랑하는 마제토'라는 이 아리아를 부를 때 체를리나는 마제토 주위를 뱅뱅 돌며 그를 툭툭 치고 쓰다듬고 찌르고 어루만지면서 갖은 아양을 다 떤다. 마제토? 때리라는 아내를 물론 절대로 못 때린다. 처음엔 찔러도 바늘 끝도 안 들어갈 듯한 표정으로 버티는 그도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여자한텐 역시 못 당해'하는 얼굴로 아내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만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굽힘없이 떳떳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을까. 그러나 신분상승의 기회에 마음이 흔들렸다가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체를리나를 보면, 그 시대 대다수의 기층민에게 중요했던 건 인격과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굶지 않고 병들지 않고 살아남는 일, 그리고 태어난 곳에서 쫓겨나지 않고 뿌리내려 살아가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을 낮춰 사랑과 동정을 구걸하고는 있지만, 오페라 속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언제나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체를리나. 흔들리기는 해도 뿌리뽑히지 않는 그 민중적인 생명력의 표현을 이 달 마지막 주에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오르는 캐나다 오페라단의 <돈 조반니> 공연에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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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숙/ 음악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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