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 살며시 와닿는 노래 부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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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송을 천만 여성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는다

- 1999년 6월부터니까 <여성시대>를 진행한 지 벌써 5년째다.

“나는 원래 라디오방송을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여성시대>는 다른 프로그램과 좀 다르다. 많이 아팠다.

처음 이삼년을 거의 우울증에 걸린 듯 보냈다. 물론 갱년기가 같이 왔겠지만. 생각해보니 그저 나이가 돼서 그랬다기보다는 <여성시대>라는 프로그램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만이라도 우리 프로그램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여성시대>의 사연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 엄청난 사연들을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본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방송을 끝내고 한강 둔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강만 쳐다보고 있었다.”

- 어떤 사연들이 가장 가슴아프게 다가왔나?

“IMF 이후에 생겨났던 생활 범죄에 관한 것들이다.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손은 탄 것 같은데도 없어진 것을 찾지를 못했단다. 몇 시간 지나서 편지 하나를 발견했는데, 김치와 쌀을 좀 가져가니 형편이 좋아지면 다음에 꼭 갚겠다는 내용이라는 거다. 이런 사연도 있었다. 이 남자는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데, 현재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한다. 자전거 가게를 하는 아내가 매일 업고 외출을 시켜준단다. 그런데 어느 겨울 날 새벽기도를 가다가 힘에 부친 부인이 2층 계단에서 주저앉아 버린 거지. 꼼짝 못하고 추운 마당에 둘이서 꼬꾸라져 있었다는 거다. 그 남자 꿈은 아내 생일날 미역국 한번 끓여주는 거, 애들 학교에 한번 가보는 거였다. 최소한의 일상을 유지 못하는 삶, 그 자체가 서글펐다. 이런 가슴으로 쓰는 육필편지가 <여성시대>에는 끝도 없이 들어온다.”

- 우울증은 지금은 괜찮은가?

“아니.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사연들을 전달할 때는 우울하고 힘이 든다. 그런데 요즘 와서 새로운 것을 느낀다. 나는 그저 말 그대로 진행자고 전달자인 것이다. 대신에 편지들끼리, 사연들끼리 서로 살려주고 보듬어주는 에너지가 교류하는 느낌을 받는다. 정말 힘이 들어 읽는 것조차 힘든 기사가 있는가하면, 이런저런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내는 풀뿌리 같은 강인한 기사들도 있고, 배를 잡고 까르르 뒹굴게 만드는 정말 재미있는 사연들도 있다. 그 이야기들끼리, 그 사연들끼리 서로 만나고 부딪힌다. 봉우리가 있고 계곡이 있는 것처럼 사연들끼리 어울리고 보듬고 그런다. 그게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된다.”

- 그 위로가 사연을 보내는 이들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사무치게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읽어주는 것? 위로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 분들이 사연을 보내고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들으면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고 스스로를 위로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연들을 읽고 공감하고 무언의 지원을 보내주는 청취자들, 그들이 위로이고 우리사회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 노래 이야기도 좀 하자.

“노래는 나이가 먹을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내 첫 노래가 온 국민의 애창가요 <아침이슬>이지 않은가? 다음 노래가 버금가든가, 적어도 먹칠하지 않아야 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한참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때, 나는 맘껏 노래해보지 못했다. 1970년대 내가 부르고 싶던 노래는 모조리 가위질 되거나 금지되었다.

디스코텍이 생겨나면서 라이브로 노래하던 작은 공간들도 점점 없어져 갔다. 지금까지 한번도 노래를 쉰 적이 없지만 여전히 지금도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맘껏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무대에 설 때 심장 벌렁증이 생긴다. 툭툭툭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나가는 건 아닌가 싶어서, 어떨 때는 확 기절해 버릴까 생각도 한다. 지금 기절하면 모든 걸 피할 수 있을 텐데 싶다니까. 내 심정은 송창식 선배가 잘 안다. 그이도 노래 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데 보는 관객들은 웃음이 일품이라는 둥 그러잖아. 둘이 무대에 서면 서로 볼 살이 바르르르 떨리는 걸 본다니까. 그냥 무대에 서서 말할 때는 안 그런데 노래 할 때만 열린다. 노래가 놀이가 되는 그 날 이 숙제가 풀릴 거 같다.”

- 90년대 중반 대학로에 라이브소극장이 생기면서 콘서트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994년 콘서트를 말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노래를 못하게 되고, 몸도 아팠고, 배낭여행도 다녀왔고, 결혼도 했고…. 어쨌거나 자의반 타의반 7년간의 외국생활을 접고 귀국해서 처음으로 콘서트를 하게 되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객석을 보면서 너무 놀랐다. 끝도 없이 들어오는 아줌마들의 행렬. 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왔을까? 홍보도 많이 못했는데. 그런데 정말 저 많은 여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내 노래를 들으러 왔단 말이야? 당시에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아파도 못 죽는다. 니가 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갚고 죽어야지. 즐겁지 않을 때, 혼자 남겨져있을 때, 어깨에 얹혀지는 손 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여성 관객들이 왜 그렇게 열광했다고 생각하나?

“당시 느낌은 단체로 조갈이 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았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그저 이 콘서트를 해마다 해야지, 그게 내 도리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청바지 양희은에서 아줌마 양희은으로 자연스럽게 자리이동을 했다. 나는 아줌마가 좋다. 동료 중에는 통기타 가수는 생머리 날리고 청아한 이미지를 고수해야하는데, 왜 자꾸 아줌마처럼 파마하고 헐렁한 옷 입고 다니냐고 하는 이도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문에 오르내리지 않는 일상적인 삶을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 그게 우리나라의 힘이다. 아줌마가 바로 그렇다.”

- 지난 해 초, 노래 시작 30주년 기념 앨범으로 나온 <양희은 30> 얘기를 좀 해달라.

“그 앨범은 '희제 엄마'에게 바쳤다. 희제엄마는 서른 중반에 결혼해서 난산으로 아이를 얻었는데, 아이가 한창 재롱부릴 나이에 무서운 병을 얻어 3년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이다. 그이가 진통제로 통증을 견디며 사흘 동안 쓴 편지를 읽게 됐다. 짧고 고단하게 살다 갔지만 따뜻한 가슴을 간직했던 한 여자의 흔적을 꼭 남기고 싶어서 30주년 앨범을 그녀에게 바쳤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앨범이었겠다.

“그렇다. 그래도 모든 앨범과 콘서트는 내게 소중하다. 1991년에 여성노동자협의회라는 곳에서 구로공단에 어린이집을 만들기 위해 공연을 한다고 했다. 그게 내가 최초로 돈을 받고 해본 공연이었는데, <난타> 하는 송승환씨가 기획했다. 나는 누구를 위한 자선공연하면 그 자리에서 그 날 벌어들인 돈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기부해버린다. 그 날도 현장에서 수표를 만들어 줬다.”

- 지난 9월에 있었던 결식아동돕기 통기타 가수들 공연 때도 그랬었다.

“맞다. 우연히 방송에서 부스러기선교회의 강명순 총무를 만났다. 그 분의 따뜻함이 마음에 와 닿았고 무엇보다 밥을 굶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내가 할 수 있다면 해야지 생각했다. 같이 모임을 하는 통기타 가수들끼리 마음을 합쳤고, 그날도 그 자리에서 수익금을 기부했다.”

- 어떤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하나?

“건강과 행복은 단일에서 오지 않는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 그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프랭크 시나트라를 좋아하는 사람과 마돈나를 좋아하는사람, 뉴키즈온더블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잘 지내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남편 얘기도 좀 해달라.

“지금의 내가 좋다. 옛날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지금이, 나이 먹은 내가 너무 좋다.

최근에 내가 쓴 노랫말 중에 “누가 젊음을 다시 주겠노라 하면, 부드럽게 거절할 것이다. … 늙은 노새는 힘은 없지만 지혜가 있다”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내 삶을 열심히 살았고 그것이 양희은의 힘이다.

남편? 생활에 지치고 힘이 들어 친구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서른 여섯살에 만났는데 3주만에 결혼했다. 여성적이고 꼼꼼한 사람이다. 결혼하기 전에 말이 매운 친구 어머니에게 인사를 갔는데 그 분이 “너희들은 형제 같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니? 남매가 아니라 형제라 말이다” 그러셨다. 진짜 짝꿍같이 산다. 뒷패가 잘 맞았다고 해야하나? (웃음)”

- 1000만 명이 듣는 <여성시대>의 진행자로서, 공인으로서 책임감이 클 것 같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사는 것, 그게 바로 책임감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신문 독자들에게 한 말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인터뷰박광수 편집국장pks@womennews.co.kr

정리최예정 기자shoooong@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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