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조현숙 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
40여년 경력의 1세대 보안전문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첫 여성 본부장

‘교사돼서 시집가라’ 어른들 얘기 뿌리치고
컴퓨터 공부에 빠져 홀로 상경한 순천 소녀
첫 여성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 올라

조현숙(63) 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 ⓒ본인 제공
조현숙(63) 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 ⓒ본인 제공

여성 최초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최초 여성 본부장이자, 대전 대덕연구단지를 통틀어 처음 본부장에 오른 여성.... 조현숙(63) 전 소장이 써온 ‘최초’의 기록은 길고 눈부시다.

그는 40여 년간 통신과 정보보안 연구·개발을 해온 1세대 보안 전문가다. 1982년 ETRI에 입사해, 2000년 정보보호연구본부 본부장, 2007년 사이버보안연구본부 본부장 등을 거쳐, 정보보호연구본부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 2017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에 선임됐다. 한국을 IT 강국으로 만든 숨은 영웅이다. 2020년 8월 말 국보연 소장 임기를 마치고 떠났지만, 지금도 전국에서 자문 요청이 끊이지 않는 이 분야의 권위자다. 그의 이름이 포함된 특허출원서만 141개다.

‘일하는 여성’이 흔치 않던 시절, 학사 출신 위촉연구원으로 출발해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수장까지 올랐다. 동년배 남성들은 부닥치지 않는 장벽을 몇 번이나 넘어야 했다. 조 전 소장은 여러 공식 석상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과 편견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찍이 ‘후배들을 위한 가교가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조현숙 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이 지난해 수상한 상장과 상패. ⓒ본인 제공
조현숙 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이 지난해 수상한 상장과 상패. ⓒ본인 제공

지난 17일, 대전에 있는 조 전 소장과 화상 인터뷰를 했다. 요즘은 중소벤처기업부 상생조정위원회, 강원도, 광주광역시 인공지능(AI)산업융합사업단, 제주도 4차산업혁명위원회 등에서 자문 활동 중이다. “코로나19 전엔 대학 강연, 세미나 등에 참석하느라 연구소 시절보다 더 바빴다”고 했다.

-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제 전문분야인 ICT 공부를 하고 있어요. AI 보안과 윤리에 관심이 많아요. 경제, 기후변화 등도 공부 중이고요. 세상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걸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코로나19 상황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됐네요. 당분간은 이런 생활도 괜찮은 것 같아요.”

- 안식년을 보내고 계실 줄 알았더니 여전히 바쁘게 사시나 봐요.

“그렇지도 않아요. 해보고 싶었던 것도 해보고, 인문학 공부도 하면서 다시 나를 찾아보려고요. 일요일마다 수채화를 그려요. 주로 풍경화를 그리죠. 2018년 시작했는데 국보연 소장이 되고는 바빠서 통 붓을 못 잡았어요. 여러 활동을 하지만 제도권에 타이트하게 묶여서 살고 싶진 않아요. 어떻게 하면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까 고민합니다.”

‘교사돼서 시집가라’ 어른들 얘기 뿌리치고
컴퓨터 공부에 빠져 홀로 상경한 순천 소녀
첫 여성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 올라

조 전 소장은 전라남도 순천 출신이다. 10대 때부터 수학과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3까지 반장, 회장 같은 대표직을 도맡을 만큼 야무졌지만, “여자가 시골에서 서울로, 더군다나 공대를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유교 가풍, “여자가 시집 잘 가려면 교사, 특히 수학 교사가 돼야 한다는 어른들의 생각”을 따라 전남대 수학교육과에 입학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막 보급되던 때였다. 친척의 권유로 서울 한국과학기술원(KIST)을 견학하다가 건물 한 층을 차지한 메인프레임을 보고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동기들이 수군대든 말든, 교사 준비는 관두고 홀로 컴퓨터 책을 읽으며 포트란(Fortran) 등 프로그래밍 기초를 독학했다. 그러다가 가방 하나 들고 상경했다. 시골 여자가 혼자 서울에 올라와 방을 구한다고 ‘업소 여성’ 취급을 받기도 했다.

- 교사라는 보장된 앞날을 포기하실 정도로 ‘컴퓨터가 내 길’이라고 확신하셨어요?

“확신은 없었는데 재미있었어요. 저는 호기심이 발동하면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하하. 그때 광주엔 컴퓨터 책이 한 권도 없어서 서울을 오가며 공부했죠. 유학을 생각해서 혈혈단신 서울에 왔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부모님께 죄송했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박차고 왔으니 뭐라도 해야 했어요. 공공기관에 지원했는데 ‘병역필’ 남성만 뽑는대요. 그러다가 컴퓨터학원에 취직했어요. 전공자도 아니고 자격증도 없었지만 독학으로 얻은 지식과 자신감이 있었죠. 저는 수학을 전공했으니까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은 전공자들처럼 가르치진 못해도, 알고리즘 연산을 최적화하고 메모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은 잘 가르칠 자신이 있었어요.

그때 유독 제 강의에 관심을 갖는 수강생이 있었어요. 남산에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지금의 ETRI) 연구원이라고, 함께 일하지 않겠냐더군요. 놀랐죠. 잘할 수 있을까? 컴퓨터공학이나 전자공학 전공자도 아니고, 여자인 내가? 마음을 정리하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했어요. 울컥해서 겨우 말씀드렸죠. ‘엄마, 제 꿈이 이뤄질 것 같아요.’”

2019년 10월 2일 시큐리티어워드코리아위원회 주최로 서울 강남구 코엑스 3층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2019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에 참석한 조현숙 당시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중앙). ⓒ본인 제공
2019년 10월 2일 시큐리티어워드코리아위원회 주최로 서울 강남구 코엑스 3층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2019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에 참석한 조현숙 당시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중앙). ⓒ본인 제공

그렇게 1982년 ETRI에 입사했다. 위촉연구원으로 시작해, 쟁쟁한 석박사 출신 남성들과의 경쟁을 뚫고 공채 1기에 뽑혔다. 전화를 쉽게 걸고 받을 수 있게 한 기술인 ‘TDX(전전자교환기)’ 개발 사업을 시작으로 웜바이러스·DDoS(분산형 서비스 거부 공격)·해킹 등 각종 사이버테러 대응 기술을 개발해왔다. 유료 위성방송 전파를 해킹해 불법 시청하는 사례가 급증했던 1990년대, 암호·인증 기능을 담은 수신제한 시스템을 개발해 1997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국가 정보보호기술 개발 방향을 제시하고 R&D 업무를 총괄 지휘해왔다. 또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한 공을 인정받아 세계 최대 정보보호 전문가 단체인 (ISC)²가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 정보보안 리더십 프로그램에서 2013년 수상자로 선정됐다.

배움과 도전을 멈추지 않은 성과였다. 잘 모르는 용어나 문제가 있으면 해당 분야를 전공한 동기를 쫓아다니며 커피를 대접하고 설명을 들었다. 독학한 내용을 기초로 논문을 써 학회에서 발표했다가 도쿄대 교수에게 공동 프로젝트 제안을 받기도 했다. 망설이다가 수락하지 못한 게 아쉬운 기억이다. 점점 일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논문·특허 실적 정리를 잊고 일에 몰두하다가 승급 시기를 놓쳐 1년 밀린 적도 있다. 한때 ETRI에서 가장 많은 기술료를 받을 정도로 잘나갔다. “2000년 여성 최초 본부장이 되면서 약 15명, 예산 16억 정도를 갖고 시작했어요. 열심히 과제를 수행해서 1~2년 만에 약 10배인 120명, 예산 150억 수준으로 늘렸죠. 정부 관료, 민간 관계자 등과 폭넓게 교류하며 네트워크를 쌓으려 노력했어요.”

국보연 소장 재직 시절 추진한 프로젝트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게 뭐냐고 묻자, 조 전 소장은 “국보연의 경량 블록암호 ‘LEA’가 경쟁자들을 제치고 2019년 ISO/IEC 국제 표준으로 제정된 것,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즈 독점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개방형 운영체제(OS) ‘구름’ 개발과 무료 배포”를 꼽았다. 아쉬운 점으론 “모의 사이버 공격·방어를 통해서 보안 대책을 마련하는 ‘국제 사이버훈련장’을 한국에 만들려 했는데 코로나19로 국제 교류가 어려워져 중단한 것, 국보연에 직장 내 어린이집을 설립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

조현숙 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과 여성 후배들이 2019년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가보안기술연구소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조현숙 전 국가보안기술연구소장과 여성 후배들이 2019년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가보안기술연구소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소수의 여성 연구자, 여성 리더로서 따가운 시선을 견딘 이야기도 들려줬다. “제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주시의 대상이었어요. 제가 결혼하자 소장이 ‘연구소 계속 다닐 거냐’ 묻더군요. 당연한데, 퇴사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네’ 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임신하고는 밥 먹으러 식당에 가질 못했어요. 배가 불러도 도시락 싸서 혼자 먹었어요.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다 걸어봤어요. 애들 낳아 키우면서 충북대 전산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죠. 육아휴직 제도도, 여성 휴게실도 없던 시절이라 엄마들은 발버둥 치며 회사 다녔어요. 거짓말하고 나와서 일 보고 병원 가고....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동안 저 같은 여성들은 거의 언제나 홀로 일어서야 했어요.”

- 늘 참고 견디진 않으셨죠. 조직 내 성차별을 지적하고 여러 개선 요구도 하셨다고요.

“여성 연구원들끼리 1983년 ETRI 여직원협의회를 조직했어요. 거듭 개선을 요구하니 조금씩 바뀌었어요. 제가 ETRI 최초로 애 낳고도 회사 다니니까, 다음에는 여성 연구원 5명이 임신을 하더군요. 이후에는 정부 방침에 따라 연구원 여성 인력을 30%까지 늘려야 했어요. 고(故) 이희호 여사의 제언으로 여성 할당제 논의가 시작되던 때였죠. 여성 전문 인력을 갑자기 구하기 힘들어서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약 15%까지 늘렸어요.

국보연 소장이 되고 보니 수많은 내부 위원회에 여성이 한 명도 없었어요. 지적하니까 갑자기 모든 분야에 여성이 들어갔어요. 제 눈치 보느라 그랬겠지만 기관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여성 인재를 뽑으려 해도 준비된 사람이 드물었어요. 여성들이 많이 양보하고 회피하기도 했고요. 실장을 뽑으려고 5명에게 연락했는데 다들 육아 문제로 거절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 본인의 리더십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제 별명이 0.5초예요. 결정이 빨라서요. 하하. 보통 리더의 지시가 늦어지면 일도 늦어지고 어려워져요. 일단 빨리 추진하고 문제가 있으면 수정하는 게 제 스타일입니다. 굉장히 모험 지향적이고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게 재밌잖아요? 업무 성과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고 보듬으려고 노력해요. 뒤처진 사람도 나름의 쓸모가 있어요. 계속해서 다른 기회를 줘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원칙주의자예요. 타협할 수 있는 상황도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지 않아요. 원칙, 정의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어요.”

국가보안기술연구소 소장 재직 시절 대중 강연을 하고 있는 조현숙 전 소장 ⓒ본인 제공
국가보안기술연구소 소장 재직 시절 대중 강연을 하고 있는 조현숙 전 소장 ⓒ본인 제공

 

“여성들, 열정갖고 재미있게 일하고
어려워도 도전을 멈추지 않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인식·발상 전환 중요”

뒤에 올 여성들에게 그는 이런 조언을 남겼다. “예전엔 ‘여성들은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 2등으론 부족하다’고 말했어요. 그땐 얼마나 여성들이 일터에서 소외됐길래 그렇게 독한 말을 했을까 싶네요. 지금은 열정을 갖고 재미있게 일하라고 하고 싶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쉽게 멈추지 마세요. 멈추는 순간 더 깊고 헤어나올 수 없는 절벽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어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가장 높은 대한민국장 훈장을 받은 여성들이 있다는 걸 아세요? 유관순 열사와 장제스 전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송미령) 여사처럼, 알고 보면 여성들은 곳곳에서 굉장한 역할을 해왔어요. 사이버 보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이 잘할 수 없는 분야는 없어요. 이제 여성이 일하고 남성은 살림하는 시대가 왔고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여성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어떻게 발상을 전환할 것인가, 어떤 기회를 새로 붙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도전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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