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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다-손> (2003).

윤석남의 작업실엘 간 적이 있다. 쨍하고 깨어질 듯한 하늘과 시리도록 눈부신 햇살이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가을임을 증명하던 어느 날이었다. 천장이 자연채광으로 된 그녀의 작업실 2층에는 그녀가 만든 작품들이 온 몸으로 가을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 광경은 참으로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마치 지하세계 혹은 수중세계 같았다. 채광창은 물위와 물밑을 가르는 경계 같았고, 내리꽂히는 햇살은 가 닿을 수 없는 뭍 세계에서 비추는 듯 멀고도 멀고 또 비현실적이었다. 어쩌다 이리로 흘러 들어왔는지,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길이 어딘지… 나는 그녀가 만든 인물조각들과 함께 이 시리도록 눈부시면서 칠흙같이 어두운 세계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윤석남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인정받는 대표적인 여성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모범적인데, 여기서 모범적이라는 말은 성공한 작가로의 의례적인 코스를 밟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작가들보다 늦게 데뷔했고 그 어떤 미술계 인맥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한 윤석남은 미술 내부적으로 또한 대사회적으로 중요한 시기마다, 역사적 순간마다 작가로서 일정한 입장을 보여주었고 결과물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는 매우 반듯하며 정의롭고 용감한 동시에 결과물 또한 널리 수용되고 항상 긍정적 평가가 동반되기 때문에 여성미술가들에게 일종의 모델케이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정치적 올바름이 예술과 충돌하지 않고 새로운 미학과 주체적인 조형언어를 탄생시켰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전시에서는 경지에 올랐다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로 완벽히 무르익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여성미술이 어떤 것인지, 그 일례가 개화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미술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간단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이 미술 안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작가자신의 인식조망체계에 대한 자각과 비판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식조망체계에는 미학과 조형언어에 대한 것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자각과 비판의식이 결여된 작품은 조형적으로도 진부하다. 물론 여기서 조형적으로 진부하다는 것은 유행에 뒤진 장르라는 뜻이 아니다. 첨단매체를 일요화가회 수준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과 비판의식은 시대를 반영한다. 우리가 흔히 예를 들 듯, 나혜석이라는 여성작가의 경우, 매우 진보적이고 치열한 인물이었으나 작품에서는 그것을 구현하지 못했다. 만화나 소설에서는 소신을 피력하였으나 당시 화단의 엘리트 장르인 유화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허용되지 않았다. 당대의 인식조망체계에 대한 자각과 비판의식이 새로운 조형언어의 탄생으로까지는 이어지기 힘든 시대였으며, 그것의 단초들을 발견해내는 것이 미술사적인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작가들이 시대적 한계 안에서나마 그러한 노력들을 해왔다. 변화와 발전이라는 키워드를 짐처럼 얹고 살았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떤 부분은 매우 빠르게 그리고 어떤 부분은 매우 더디게 불균형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앞선 시대의 선구적인 전통을 잇지 못하고 오히려 일시적으로 후퇴한 부분도 많았고, 예측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현상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영향을 주어가면서 진행되었다기 보다는 파편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축적되기보다는 휘발되고 소모되었다. 인식과 미학과 형식실험은 각각 따로 놀았으며 그 발전 정도는 천차만별이었고 아예 그러한 현상이 예술적 미덕으로 공인되었다. 나혜석의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발전한 시대지만, 과연 발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인 것이다.

지금 2003년 우리의 모습은 이것이다.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문화를 이야기하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윤석남의 작품 앞에서 진땀이 난다. 기형적이고 불균형적인 인식과 감성으로는 이 여성작가의 인식체계와 미학과 조형언어의 당당한 조화, 그래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예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석남은 이제 이 정도 시대라면 많이 보여져야 할 작가 중 한 명이다. 어떻게 보면 교과서 같은 케이스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범적인 작가가 너무 없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범적이라는 말을 모두가 따라야 할 주류이자 전형적 형식이라고 듣는 작가들은 없었으면 좋겠다.

오히려 윤석남의 세계는 주변적인 세계이다. 그녀의 작업실에서 느꼈던 그 부유감은 바로 길을 잃은 자의 것이다. 그녀는 길을 잃은 자들의 인식체계와 미학과 조형세계를 하나의 케이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케이스의 내부요소들이 너무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모범적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60대의 윤석남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당당하다고, 당당하고 싶다고 말한다. 충분히 당당해도 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팥쥐들의 행진'이라는, 대한민국에서 나름대로 유명하고 화려한 여성작가들을 대거 초청해 대형전시를 연 적이 있었다. 물론 진지한 주제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경쾌한 축제분위기의 전시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한 평범한 남성관람객의 관람평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여자들이) 사는 게 그렇게 힘들더냐”는 것이다. 전시를 통해 그런 메시지가 전달이 되었다는 것에 나는 전율했다.

윤석남의 세계는 수면 위로 떠오르고 싶어하나 닿지 못하는 수중세계이며 그녀의 조각들은 수중세계의 언어로 얘기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고 가끔 그 언어로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설혹 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그 평범한 남성관람객처럼 자신을 낮추어 볼 일이지 않을까?

오혜주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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