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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편, 요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30년 만에 만난 대학동창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느닷없이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 초에야 흉이든 자랑이든 입만 열면 남편 이야기에 열을 올리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되면 아무도 남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여자들의 규칙 아닌 규칙인데 이번엔 의외였다. 무슨 심각한 내용이길래 그럴까 모두들 긴장해서 그 친구의 입만 쳐다보았다. 이쯤 살다 보면 사람 사는 길에 드라마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사건이 곳곳에 매설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법이다.

친구들의 긴장된 표정을 배반이라도 하는 듯이 이어지는 말은 아주 엉뚱했다. 외로움을 감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이 들면 다 외로운 법인데 웬 엄살. 친구들은 피식 웃었다. 다름 아니라 아들만 있는 부모로서 감수해야 하는 외로움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친구의 남편은 유난히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지역 출신인데다 역시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올데 갈데 없는 꼴보수 남성이라고 했다. 그런 남자가 떡하니 아들만 둘을 두었으니 젊은 시절 그 자부심이 오죽했을까.

그런데 이제 두 아들이 다 자라 결혼할 때가 되니까 주위에서 들려 오는 이야기들이 영 심란스러웠다. 당연히 노후에 아들들을 곁에 두고 며느리들로부터 대접받으며 위풍당당 살리라고 했던 그의 계획은 말 그대로 야무진 꿈에 불과하더란다. 결혼은 이제 며느리를 데려 오는 의례가 아니라 아들을 빼앗기는 의례로 변한 지 오래인데 공연히 부자간의 의를 끊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신랑부모가 정신 단단히 차리라고 하더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자신을 부러워하던 사람들이 이젠 오히려 불쌍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쁠 정도란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아들들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사는 게 현명하다는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보니 벌써부터 인생이 너무 외로워지더라고, 하지만 외로움을 감수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비장하게 선언했다는 것이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남자들은 지진아란 생각이 든다. 세상이 변한지가 벌써 언제인데 코앞에 들이대야 겨우 알아채다니.

하긴 나이든 남자들이 변화에 둔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네 여자들이 변했네 어쩌네 해도 내 옆의 아내가 나를 여전히 하늘처럼 떠받치는데 무슨 상관이 있었겠남. 그러고 보면 너무 착한 아내를 둔 남자도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좋은 것만도 아닌 셈이다.

아무튼 이제 아들만 둔 부모는 선망의 대상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불과 한 세대만에. 좀처럼 안 바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바람이 분다 싶으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하는 성격의 사회라 그런지 딸 아들에 대한 생각도 엄청나게 달라졌다. 아니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들 딸 성비가 위태롭다고 난리들이었는데 어느 새 쑥 가라앉았잖은가.

한 자녀 낳기가 대세로 기울어지면서 하나 낳을 거 이왕이면 아들 낳겠다고들 해서 걱정했는데 요즘은 완전 거꾸로다. 이왕 낳을 거 딸이면 좋겠다는 부모들이 훨씬 많아진 것 같다. 대를 잇는다는 관념도 약해진데다 아들이라고 나중에 덕을 볼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딸을 선호하게 만드나 보다. 결혼한 후에 부모를 살뜰히 챙겨주는 건 단연 딸이고. 그러니 옛날 가족계획 구호처럼 억지춘향식으로 딸이 좋아! 라고 꼬드기는 게 아니라 경제적 정서적으로 딸 쪽이 훨씬 이득이라는 실리적 차원에서 모두들 딸이 좋다고 외치게끔 된 거다.

불행히도 아들만 셋씩이나 둔 나는 요즘 만인의 동정을 한 몸에 받고 다닌다. 얼마 전 지방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만난 초면의 중년여성은 내가 아들만 셋이라고 하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어머, 이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객사하시겠네.” 였다.

아들 하나면 건넌방에서, 둘이면 골방에서, 셋이면 이 아들 저 아들네로 왔다갔다하다가 길거리에서 죽는대나, 뭐라나. 그런데, 얘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그럼 딸 가진 엄마가 죽는 곳은? 외손주 업은 채 부엌에서 죽는단다. 깔깔깔.

박혜란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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