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운의 문예사색] 한국 근현대미술 재정립의 중요성, 이세득
[최고운의 문예사색] 한국 근현대미술 재정립의 중요성, 이세득
  • 최고운 큐레이터
  • 승인 2020.11.28 07:35
  • 수정 2021-01-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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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미학의 선구자
근대미술사에 기여한 미술행정가
이세득 Lee SeDuk, 허(虛) The Cosmos, 1961,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90×145cm©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최고운 큐레이터 = 작가의 격앙된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듯한 거칠고 원시적인 검은 표현주의적 필법과 제스처, 대담한 비정형의 추상 구성이 돋보인다. 물감의 중첩된 층들로 구성된 두터운 텍스처가 서로 엉기고 덮친 형태들 사이로 번져 나오는 듯한 기법으로 억압된 감정을 드러냈다.
이세득 Lee SeDuk, 허(虛) The Cosmos, 1961,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90×145cm©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             
최고운 큐레이터 = 작가의 격앙된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듯한 거칠고 원시적인 검은 표현주의적 필법과 제스처, 대담한 비정형의 추상 구성이 돋보인다. 물감의 중첩된 층들로 구성된 두터운 텍스처가 서로 엉기고 덮친 형태들 사이로 번져 나오는 듯한 기법으로 억압된 감정을 드러냈다.

 

지난해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의 <우주 Universe 5-IV-71 #200>(1971) 작품이 132억 원에 낙찰됐다. 경매 수수료까지 포함하면 무려 153억 원으로, 한국 미술품 최고가다. 김환기를 비롯해 단색조 회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 한국적 미니멀리즘, 모노톤 아트, 단색주의 그림으로 불리는 ‘단색화’ 작품에 대한 수요가 2014년 여름 이후 급증하며, 여전히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근대화 정책으로 경제적 도약과 인권의 탄압이 혼재했던 1970년대에 단색화 작가들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새로운 회화를 한다는 일념으로 작업에 임했다.

미술 작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활동했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과 함께 당시 화단의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필자는 작년부터 부지런히 한국 근현대미술의 재정립을 위해 베일에 가려진 위대한 우리나라 작가들을 알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박생광을 시작으로, 오세열, 이승조 그리고 네 번째 작가로 이세득을 소개하려 한다. 

이세득 Lee SeDuk, 작품 Work, 1978-79,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13×145cm©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
이세득 Lee SeDuk, 작품 Work, 1978-79,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13×145cm©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

 

한국적인 시각의 리듬: 이세득

① [1시기: 1940-1950년대] 형성기 ② [2시기: 1958-1967] 학습 및 모색기: 프랑스 유학 및 활동 ③ [3시기: 1968-1980] 절정기: 한국 전통 미감과 국제적 감각 절충 ④[4시기: 1981-2001] 성숙기


이세득(李世得, Lee SeDuk, 1921-2001)은 프랑스 유학 시절에 접했던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단순하고 추상적인 화면에 두터운 마티에르가 돋보이는 구성을 보였다. 이러한 작가의 작품은 당시 젊은 아방가르드 미술의 정창섭, 박서보, 윤명로가 주도했던 경향과 맞물리면서 한국 추상미술의 본격적인 궤도의 시발점을 마련한다. 이세득은 단순히 파리에서 체험한 국제적인 감각을 표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 고유의 살아있는 전통의 미감을 절충하는 실험에 대해 고심했다. 한국 민속문화에 면면히 배어 있는 전통미술의 정체성을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융화시키려는 시도를 1980년대까지 지속했다.

이세득의 작품은 초기의 검고 음울한 색조에서 한국적 모티브의 색채인 빨강, 황토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전통과 현대, 서양적 방법과 한국적 정신을 풍요롭고 자유로운 작가의 심상으로 화폭에 옮겼다. 하늘에 펄럭이는 색동연이나 춤 사위를 연상시키는 듯한 밝고 가벼우면서도 환상적이고 율동적인 현란함을 선사했다. 
이세득은 그 당시 세계 미술에서도 인정을 받았는데, 1972년 ‘제4회 카뉴국제회화제’ 한국 대표, 같은 해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를 했으며,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첫 국외 개인전을 갖는다. 잇달아 미국, 일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8년 ‘인도 트리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해 찬사를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까지 이르렀다.

 

이세득 Lee SeDuk, 작품 Work, 198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90×116cm©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
이세득 Lee SeDuk, 작품 Work, 1982,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90×116cm©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

 

진정한 미술인, 이세득

이세득은 창작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일찍이 한국의 미술을 세계로 알리기 위해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몸소 실행했다. 1965년 ‘국제조형예술가협회(ISPAA)’의 한국 대표, 1966년 ‘제5회 IAA 동경총회’ 한국 대표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실제 이러한 활동들은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진출시키며 한국미술의 국제화에 큰 기여를 했다.
1968년에는 이세득의 주도하에 ‘동경국립근대미술관’ 《한국현대회화전》 전시를 개최하게 되며, 같은 해 ‘국제조형예술가협회(ISPAA)’의 《한국전》 전시가 실현되어 국제적인 규모의 현대미술이 한국에 첫 선을 보이게 된다. 이 밖에도 미술 대학 간의 국제적인 교류에도 큰 공로를 했으며, 오사카 예술대학교와 홍익미술대학교의 자매결연에 산파역을 맡았다.
이세득은 화가로서 격동하는 한국 근대사회에서 자신만의 예술 구축과 더불어 누구보다도 일찍이 한국적인 것을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했고, 평생을 실행에 옮겼던 진정한 미술인이었다. 

서두에 밝혔던 단색화 열풍 이후, 사실 국내 미술에서 큰 모멘텀은 없었다. 열풍을 이어갈 또 다른 콘텐츠 모색과 한국 근현대미술의 재조명이 시급한 시점이다. 이세득은 단색화 화가들이 활동했던 1970년대에 단색조의 회화는 아니지만, 오히려 다른 편에서 세계 미술의 본질을 색동문양과 띠 형태로 한국적 감각과 조형성에 맞춰 알맞게 토착화시켰다. 
1970년대는 문화예술 국제화, 한국 문화예술 정책의 태동기로 예술 분야에 실질적인 투자와 문화 중흥이 목표로 정립되었던 시기였다. 실제로 이때에 수많은 우리나라 근현대 작가들이 전위적인 실험미술이나 행위예술 등의 창작활동을 선보였다. 진정한 미술인이라면 이들의 예술세계를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한국 미술의 발전과 국제화에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송미숙, 「이세득-모더니즘의 마지막 기수」, 『이세득』, Editions ICRD, 1999, pp.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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