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 추석날 새벽,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 한국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멕시코에서는 WTO 5차 각료회의가 진행 중이었고 이경해라는 한국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故 이경해씨는 젊어서부터 농업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지역에서도 도의원을 지내는 등 인정받는 농민이었다. 이렇게 살아온 그가 왜 머나먼 이국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먼저가야 했을까.

94년 우르과이라운드가 있은 뒤 농업분야 개방이 이루지면서 한국 농업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논농사 중심의 우리 농가는 과수, 화훼, 과채류 등을 하우스에서 키우는 일명 하우스 농가로 변신했다. 논농사만으로 먹고살기 어렵기에 논농사를 돈이 되는 하우스 농사로 바꾸는 농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논농사가 하우스 같은 밭농사 중심으로 바뀌자 여성 농민들의 노동량은 그 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과거에도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는 밭농사는 주로 여성 몫이었다. 하우스 농사가 자리잡으면서 여성 농민의 노동량은 매년 올라가고 있다. 실례로 80년대 이전에는 여성농민 노동량이 전체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52%나 차지하고 있다.

여성농민은 밤낮없는 하우스 농사일과 가사노동만으로도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4∼5시간 밖에 되지 않는데도 일일노동, 식당 일 등 더 많은 노동을 해야만 위태로운 가정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농업개방은 여성농민의 노동 강도를 점점 높이고 있다. 노동 강도가 세진 만큼 먹고 살만 하다면 그런 대로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 학비는 고사하고 하우스농사에 들어간 생산비조차 건지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농업은 붕괴되고 농촌 가정도 파탄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개방하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농업은 어느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국민들은 안전한 농산물 먹기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대신 유전자 변형된 농산물과 농약으로 범벅된 과일, 유기농으로 재배했지만 이동 중에 상하지 말라고 뿌린 방부제로 뒤덮인 채소들이 우리 밥상을 장식할 것이다.

값싼 농산물이 들어온다고 소비자는 환영할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농업이 남김없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도 좋은 일로만 여겨질지 두고봐야 할 것이다. WTO에 대응해서 우리 농업을 지키는 일은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국민들이 함께 가져가야 할 식량주권이다.

여용옥/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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