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머니의 성을 선택했습니다”… 부성우선주의에 제동 건 자매
“저는 어머니의 성을 선택했습니다”… 부성우선주의에 제동 건 자매
  • 김서현 기자
  • 승인 2020.10.29 14:06
  • 수정 2020-11-09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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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성으로 변경한 배세정씨
‘성·본 변경허가심판 청구’ 통해
동생과 함께 어머니 성으로 변경
“부성주의는 성차별에서 기인…
가부장제 깨기 위해 바꾸기로 결심“
전문가 “법원의 전향적인 결정”
배세정·배세진 자매가 연 깜짝파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성·본 변경 허가서 봉투를 열고 있다. 허가서를 확인한 어머니 배모씨는 눈물을 쏟았다.
배세정·배세진 자매가 연 깜짝파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성·본 변경 허가서 봉투를 열고 있다. 허가서를 확인한 어머니 배모씨는 눈물을 쏟았다. ⓒ배세정씨

 

배세정(24)씨는 새로운 이름으로 9월1일을 맞았다. 전날까지 아버지의 성을 딴 ‘이세정’이었으나 이날 부터 세정씨의 이름은 어머니의 성을 딴 ‘배세정’이 됐다. 동생 세진씨도 함께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부모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와 자매의 사이도 특별히 문제가 있지 않다. 배세정씨는 “다만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지난 8월 배세정씨와 배세진씨는 스스로 선택해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범죄 등과 연관 등 특정 이유 없이 성인이 성을 어머니의 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 알려진 사례다. 자매의 성이 바뀐 것을 확인한 어머니 배모씨는 과거 호주제 폐지 운동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자매에게 자신의 성을 주는 데에는 실패했다. 자매가 나서서 성을 바꾼 것을 확인한 어머니 배씨는 기쁨의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신분증부터 은행, 포털사이트 정보를 고치고 바꿔야 하는 게 많다. 일일이 서류를 떼서 보내야 하니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라면서도 배세정씨는 미소를 지었다.

“성·본 변경 허가서를 받고 깜짝파티를 했어요. 케이크를 사서 카메라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 ‘엄마 우리 파티하자!’ 했어요. 그리고 엄마가 봉투에 담긴 성인 성·본 변경 허가서를 열어보더니 ‘이게 뭐야!’ 연발하시더니 막 우셨어요. 허가서가 나올 때까지 우리가 성을 바꿀 거라는 걸 미리 알리지 않았거든요.” 

변호사 없이 홀로 5개월 준비

배세정씨가 성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직접 행동에 나선 건 지난 3월의 일이다. 성인이 성본을 바꾼 일은 전례도 없었고 변호사를 선임해야 수월했지만 배세정씨는 변호사 선임 없이 직접 모든 일을 해냈다. 준비하는 데에만 5개월이 걸렸다.

“하기로 하고서 바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어요. 저도 처음이고 법원도 처음이니까요. 가정법원에 전화도 하고 직접 가서 무료 법률 상담을 받기도 했고 필요한 서류를 모두 뽑아서 직접 빈칸을 일일이 채워야 했어요. 진술서를 쓸 때는 길게도 써보고 짧게도 써보고 불쌍하게도 써봤어요. 결국에는 내가 법적으로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자 하는 이유를 제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대자보처럼 썼어요.”

일부 사람들로부터 ‘굳이 왜?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배세정씨는 공연업계에서 일하며 나이 많은 이들과 자주 만나다 보니 직장 관계자 전부에 사실을 알리진 못했다. 조만간 SNS에 글을 쓰는 방법으로 성을 바꾸게 된 이유에 대해 알릴 참이다.

의외로 성을 바꾼 것을 알고 가장 크게 화를 낸 것은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그래도 그렇지, 아빠 성을 바꿀 수가 있냐, 무슨 의미가 있냐?’며 화를 냈다. 자신의 성을 물려줬던 아버지도 썩 달갑게만 여긴 건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 당신이 물려준 성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자매가 불효를 저지른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6월에 아버지의 동의서가 필요하다는 보정명령서를 받았어요. 도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더니 한 번에 주시진 않았어요. 아빠가 불만을 가진 부분은 성본 변경의 문제가 성을 물려주는 당사자인 엄마와도 관계있는 일인데, 알리지 않고 우리끼리만 처리하려는 부분이었어요. 그래도 이번 일은 우리 자매의 의지와 주체성에서 하는 일이라는 걸 설득했더니 ‘이 뒤로 관여하지 않을 테니, 너희가 논의하고 선택해서 결정하라’며 신분증과 도장을 주셨어요. 아빠가 우리의 권한과 주도권을 인정한 거에요.” 

내 자녀가 여자들의 역사를 기억하길 바랐다

배세정씨가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로 한 데에는 성차별적인 사회와 가부장제적인 문화 관습을 깨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활동할 때는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고 한들 외할아버지의 성이기 때문에 평소 아예 성 없이 자신의 이름만 말하기도 했다.

“엄마 성을 따르는 건 단순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부계 성을 따르는 건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힌 차별적인 문화에요. 남자의 역사만을 이어간다는 건데, 이걸 끊어내고 싶었어요. 내가 엄마 성을 따르면서 언젠가 자녀가 생기면 나의 성, 어머니의 성, 할머니의 성 이렇게 여자들의 역사를 기억하길 바랐어요. 주변인들도 나 같은 사람을 보면서 ‘꼭 남자 성을 따를 필요는 없구나’ 생각하길 바랐고요. 행동해야 바뀌니까, 그래서 정말 행동한 거에요.”

2005년 헌법재판소는 남성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성과 본에 대해 “성 역할에 기초한 차별로 정당한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하는 제도”라고 판결했고 2008년 호주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에는 태어나는 자녀에게 어머니 성을 물려주는 일도 늘고 있다. 그러나 성인이 성을 모계 성으로 바꾸는 일은 “복리를 위한 성본 변경 필요가 적다”는 관점에서 아직 쉽지는 않다. 성인의 경우 자신이 성을 변경하지 않아 생기는 어려움에 대해 진지하고 길게 써야만 한다. 그러나 배세정씨 자매는 성평등을 실천하고 호주제 폐지에 헌신했던 어머니 배모씨의 의지를 이어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건본인들은 성과 본을 변경함으로써 성평등과 국민의 권리를 위한 새 제도를 몸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저희 사건이 성⋅본변경을 원하거나, 자식에게 어머니의 성과 본을 부여하길 원하는 다른 많은 국민들을 위한 또 하나의 전례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건본인들의 주변인들 역시 변경된 본인들의 성과 본을 접함으로써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는 원칙이 당연하지 않으며, 성과 본을 선택하고 부여함에 있어 헌법에 천명된 평등의 가치와 대한민국 국민의 존엄과 자율성이 우선됨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실제 배세정·배세진씨가 심판청구서 내 진술서에 작성한 내용)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자의 성⋅본 변경허가 심판청구서'.
어머니의 성으로 바꾸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자의 성⋅본 변경허가 심판청구서'.

 

성본 변경을 위해서는 가정법원이나 지방법원에 ‘자의 성과 본의 변경허가심판 청구’를 내야 한다. 청구인(어머니)과 사건본인(바꾸고자 하는 사람), 아버지의 가족관계 증명서, 청구인과 사건본인의 주민등록등본, 청구인의 혼인관계증명서, 사건본인의 기본증명서·범죄경력조회서 등을 제출하면 된다. 한국신용정보원에 사건본인의 신용정보조회도 이루어진다. 이는 범죄 사실이나 채무의 면피 등을 막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송달, 등본 비용 등으로 20여 만원이 든다.

배세정씨는 자신과 같이 모성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료법률상담을 적극 이용해보라고 조언했다. “사실 성인 성본 변경을 접하지 못해본 사람이 많다 보니 딱 떨어지는 해결책을 주진 않아요. 대신 필요서류나 미성년자 변경 케이스의 진술서 양식 등을 엿볼 수 있어서 도움이 돼요.”

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법률구조2부장은 이번 사례를 “아주 전향적인 법원의 결정”이라고 말했다. 박 부장은 “민법 제718조가 부성을 원칙으로 하고 모성은 예외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한 탓에 우리 사회 구성원이나 법조계와 법원의 의식은 그간 성인으로서 성과 본을 변경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전향적인 판결을 내려주지 못했다”며 “이번 배세정씨의 사례가 판례는 성인 본인의 의사를 크게 존중한 전향적 결정으로 보여 큰 의미를 갖는다. 이번 일이 계기가 돼 법 조문까지 바뀔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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