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많았던 여름도 가고 벌써 신학기다. 가을 신학기가 시작되니 수시모집이니 수능이니 하는 보도에 괜히 마음만 바쁘고 부산하기만 한데 우리 아이들은 방학보다 차라리 개학이 좋단다. 초등학생은 피아노니 속셈으로, 중고등 학생들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입시학원에서 날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게 방학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소자녀화 현상으로 대학을 진학하는 18세 청년인구가 감소하여 대학 진학이 쉬워졌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는 10대와 20대의 '프리터(free-arbiter의 준말)'가 200만을 넘는다는 일본에서는 아이들이 학교 학습에 흥미를 잃어버리는'배움으로부터의 도주'가 심각하다고 하니 우리나라 아이들의 모습은 아직 고무적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겪었던 이문화 체험이 생각난다.

스무 살에 6살과 4살의 아이엄마로 덤프트럭을 운전하고 있던 고우짱 엄마가 같은 보육원에 다니고 있던 딸과 나를 그녀의 성년식 생일에 초대해 주었다. 아침마다 파리도 못 빠져 나올 것 같은 빠글빠글한 펀치 파마에 앞니까지 빠져 무서운 인상의 말없는 아빠만 보다가 빨갛게 물들인 양 갈래 머리에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의 고우짱 엄마와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달려나갔다. 엄마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 동안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던 아이들 사이에 조그만 소동이 일어나 가 보니 고우짱이 벤츠만 가지고 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고우짱은 벤츠 좋아하니까 나중에 훌륭한 사람되어서 진짜 벤츠 가지면 되겠다'라고 달래고 있었더니 얼마 전에 필리핀의 세부를 다녀왔다며 가족사진을 보여주던 고우짱 엄마가 “쟤는 멍청해서(바카: 빠가가 아니라 바카다) 벤츠 모는 운전수나 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쓸데없이 허황된 생각이나 하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해요?”라며 정색을 한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통령, 장군이 되라고 할 텐데. 온갖 희생을 감수하며 자녀 교육에 힘을 쏟는 우리의 부모를 생각하고 나 같은 딸 안 낳고 아들만 둘 두어서 다행이라고 깔깔대며 세부에서의 일주일을 설명하는 고우짱 엄마가 별세계 사람처럼 멀게만 느껴져 그 이후 더 이상 친해지는 일은 없었다. 덤프 트럭을 운전하는 고우짱 엄마가 고우짱을 운전수로 키우고 싶어하는 거나 장래 아버지의 직업을 선택할 거니까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겠다는 학생들, 아니 대학을 졸업하고도 기계공이나 조그만 우동 집 같은 가업을 잇는 일본 청년들의 모습에서 부모의 사회계층이 재생산되는 폐쇄사회 일본을 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 때 느꼈던 생소함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학교공부로 과외로 지쳐가는 아이들과 자식들의 과외비를 마련하려고 집 팔고 논 팔고 심지어는 파출부로 나선다는 우리 부모들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방학마다 살아있는 현장으로 여행을 하며 가족 간의 유대를 다져가고 아이들의 적성을 찾아 눈높이 인생을 배우게 한다던 고우짱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고우짱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미란/일 동경대 교육학 박사·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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