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 로맨스드라마 뜬다

청년실업, 그 중에서도 여성실업의 문제가 심각한 요즘 TV에는 로맨스 드라마가 한창이다. ‘우울한 여름’을 맞고 있는 여성들에게 로맨스 드라마는 어떤 의미일까. 청년 실업 이면의 로맨스 드라마 열기를 취재했다.

~13-1.jpg

청년 실업과 로맨스 드라마의 상관관계

올해로 4년째 작은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28·여)씨는 ‘고급스런’ 취미생활과 소비 탓에 만만치 않은 카드 빚을 지고 있다. 결혼 적령기에 든 여성에게 이 사회가 요구하는 요건에 부합하지 않게 모아 둔 결혼 자금은커녕 빚만 늘었다고 자조하는 그가 마지막 희망으로 삼는 것은 결혼. 김씨는 “한 결혼정보업체에 카드 빚을 갚아주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광고가 실렸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카드 빚은 결혼하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언젠가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직장 찾기보다 사랑 찾는 게 수월

현실 잊게 하는 로맨스드라마 인기

대학교 졸업 이후 1년 동안 작은 무역 회사에 근무했던 정모(28·여)씨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졸업할 무렵이 되고 막연히 생각했던 고학력 실업이 피부로 다가오자 정씨는 최근 주변의 소개로 맞선 자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오는 사람들 조건은 다 괜찮지만 왠지 계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왜 선을 봐야 하는 건지, 문제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고 정씨는 말한다.

이 여름이 향기롭다고?

오랜 준비와 치밀한 전략이 따르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 가난한 독립과 안정이라는 달콤한 유혹 사이에서 갈등하는 2, 30대 여성들은 여전히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하거나 임금 수준이 낮아 평생직장의 희망이 좌절되는 여성들에게 결혼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현실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2월 S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김연정(25·가명·여)씨는 작은 회사에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주변에서 컵 닦고 잔심부름하는 일에 불만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김씨는 “그런 일을 해도 일을 한다는 것이 어딘가라는 심정이다. 친구들의 경우 생각했던 것과 일이 달라 그만두고 결혼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취업이 워낙 어렵기 때문에 많은 부분 순응하는 편이다”고 전한다. 회사원 이모(29·여)씨는 “학력이나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연애는 쉽지만 결혼은 현실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조건을 따지게 된다. 예전엔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길 바랐지만 요즘은 그냥 편한 마음으로 연애만 하겠다는 입장이다”고 말한다.

@13-2.jpg

경제적 지위가 불안하거나 평생직장의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 여성들에게 결혼은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사진·민원기 기자>▶

청년(15∼29세) 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6월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7.6%에 달하는 청년 실업률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1.5%포인트나 상승하고 구직을 포기한 이들의 수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26% 늘어난 8만7000명에 달한다. 취업의 문턱을 넘은 대다수 젊은이들도 비정규직으로, 자발적 취업포기자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이 비율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청년 여성실업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 결과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여성들은 결혼 시장에 내몰린다. 졸업을 앞두고 결혼정보업체를 찾는 여성들이 늘어 한 업체의 직원은 “작년부터 여대생 가입이 늘었다. 미리 결혼하고 학업을 같이 하겠다는 생각이거나 부모님 권유로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한다.

학력이 너무 높거나 낮아서, 평생직장이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여성들은 결혼을 택한다. 자신이 처한 현재 조건은 불리하지만 이를 만회해 줄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 결혼에 골인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은 아직까지 식지 않고 있다.

한편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비웃듯 뜨거운 로맨스 드라마 열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방송 3사가 경쟁하듯 내놓은 프로그램들은 전작의 성공에 임입어 4계절 동일한 로맨스 각본으로 승부하거나(KBS ‘여름향기’), 주변 사람들의 아픔에는 무관심한 채 천진난만하기만 한 여자 주인공을 등장시키고(SBS ‘첫사랑’), 아예 하이틴 로맨스 소설, 순정만화의 구도를 따와 로맨스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보인다(MBC ‘1%의 모든 것’) . 갈등과 일상 속 이야기보다 설레임, 친밀함 등에 치우친 이들 드라마는 낭만적이고 순수한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름향기’를 즐겨본다는 이영희(29·회사원·가명)씨. “주인공들이 만나는 장면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맥락이 없다는 느낌이 들지만 설정된 배경 화면이 너무 좋아 계속 보게 된다.” ‘가을동화’ 마니아였던 대학원생 김모(29)씨는 “화면과 주인공이 너무 예쁘다. 순수한 사랑에 대해 현실적으로 회의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사랑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보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이국적인 배경이 20대 여자 시청자들을 사로잡지만 사실성이 떨어지는 캐릭터, 인물들의 관계는 전근대적이라는 지적이다.

회사원 김모(28·여)씨는 평등한 남녀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 드라마 속의 전형적인 로맨스 각본과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꼬집는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느낌에 전혀 끌리지 않는다. 사람의 감정 자체가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런 스토리 자체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한다.” 이영희씨는 “주인공 혜원이 겪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자기감정에 충실하지 않은 캐릭터는 60년대 여성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이국적인 화면, 분위기, 현대적인 극중 인물들의 직업과 달리 전통적인 인물상, 즉 수동적이고 지고지순한 여자 주인공과 헌신적으로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공존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심리학자 방희정(55·이화여대심리학과)교수는 “현실에서 욕망하는 것과 현실간의 거리가 클수록 판타지는 커진다. 현실에 대한 결핍감을 채우고 대리만족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로맨스 드라마가 인기를 모으고 있는 까닭을 설명한다. 조혜정(56·연세대 사회학과)교수는 일찍이 낭만적 사랑의 유행 풍토에 대해 “산업화 단계인 70년대 수입된 낭만적 사랑의 각본이 우리 사회의 경제적 조건과 부합하지 않는 유행성 각본으로 남게 될 때 우리 문화를 상투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급속한 근대화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온 서구 문화와 사회 저변에 깔린 전통적인 유교문화 정서가 혼재된 지점으로 읽히기도 한다.

모 드라마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매번 반복되는 구도에 질렸다. 또 여자 주인공이 죽는 이야기인가”, “첫사랑에 집착하는 피터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가슴 뭉클한 억지 감동을 자아내서 시청률을 높이려는 무사안일주의다” 등의 비판이 난무한다.

이해되지 않는 맥락이 다분하지만 로맨틱한 분위기와 화면에 취해 눈을 떼지 못하는 여성들. 시대가 변하고 현실이 힘겨워도 로맨스 드라마의 구도, 캐릭터는 변화해선 안 된다.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캐릭터일수록 매력이 있다. 그 이유를 되짚어 보자. 노동시장이 여성 구직자를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이라는 대안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도록 몰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낭만적 사랑-반드시 결혼에 골인해야 하는-이라는 매개가 놓인다. 드라마 속의 로맨스 각본과 여자 주인공은 취업이 어려운 이 시대의 자화상인 것이다.

여성학자 이박혜경(41)씨는 “우리나라 여성들은 아직 경제력으로나 문화적인 여건으로나 자유로운 사랑을 꿈꿀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럼에도 결혼의 동기로 사랑이 강조되는 것은 여성이 결혼을 통해 물적, 인간적 생존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현실을 가리고 미화시킨다”고 지적한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저자 살스비는 “사랑은 이미 사회적 산물이다. 남녀간에 사랑에 대한 관심이 불평등한 이유는 남성들이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지위를 얻는 반면 여성들은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서만 지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 쓰고 있다.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립을 획득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을 취하게 만드는 로맨스 환상은 줄어들 것이다. 결혼과 이를 위한 낭만적 사랑을 전략으로 택하지 않고 TV 앞에서 물러나 일하는 여성을 보게 될 때 드라마 속 시대착오적인 여성상도 바뀌지 않겠는가.

임인숙 기자isim123@womennews.co.kr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