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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원기 기자>

학자에서 소설가로 조은 교수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사회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올 초 <침묵으로 지은 집>을 내놓고 지난달 20일 ‘책 읽은 사람들의 모임’을 가졌던 조은 교수를 만났다.

역사란 여성의 소리가 없는 ‘침묵으로 지은 집’

여성의 기억 속의 역사 드러내고 기록하기 시도

침묵에 익숙한 세대가 있다. 전쟁이라는 화상이 너무 뜨거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이들. 혹은 글과 언어가 없어 그 경험을 표현하지 못했던 이들.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조은(동국대 사회학과·57) 교수의 작업은 이렇듯 여성으로서, 언어를 가진 이로서 ‘써야만 했던’시대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출발한다. 다섯 살 아이의 기억에서 시작되는 전쟁은 그 이전 세대가 가진 상처에서 조금은 비켜서 있다. 불에 덴 듯 뜨겁지도, 들추어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도 않다.

올 초 <침묵으로 지은 집>을 내놓고 지난 20일 ‘책 읽은 사람들의 모임’을 가졌던 조은 교수를 28일 연구실에서 만나보았다.

여성이 쓰는 분단 소설

“우리 세대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 동안 참 없었구나. 박완서 선생님이 열 여덟 살 때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계속 써왔고 그 다음 세대 남성 작가들은 끊임없이 쓰는데, 왜 여성작가들은 그걸 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성학자 박혜란, 이프 박옥희 발행인, 영화평론가 유지나, 장하진 여성개발원장, 이상경 카이스트 교수 등 ‘뜨겁지 않게’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모인 이날 자리에서는 박완서 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후 드물게 나온 여성이 쓴 분단 소설에 대한 느낌들을 풀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 얘기다, 우리 세대의 얘기다라고 해요. 이상경 선생님 같은 경우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그러고 유지나씨 같이 30대 후반 젊은 세대들은 그건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대의 이야기다 그래요.”전쟁 이후 침묵해 온 세대, 침묵해 온 여성들이 처음으로 기억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역사란 그 자체가 ‘침묵으로 지은 집’이다. 어느 날 찾아 온 아버지의 부재. 때때로 잊혀지고 불쑥불쑥 떠오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전쟁이 끝나고 15년이 지나도록 남편의 귀환을 기다린 어머니. 그가 맞닥뜨린 것은 그런 아버지이기보다 아버지의 부재를 통한 역사였다.

어머니를 ‘작은아씨’라 부르던 구서방댁, 시어머니의 묵인 하에 아이를 갖는 가회동 숙모, 총살당한 할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막수(당시 호남에서 후처를 부르던 말), 풍요로운 기억을 주었던 외가 샘물마을의 아짐들. 전쟁과 시대가 낳은 아버지, 남편, 아들, 애인의 부재에 어떻게든 얽혀야 했던 여자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동시에 이들은 다섯 살 아이의 시선 속에 존재했던 실제 인물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들을 남성 작가들이 재현하는 전쟁 소설 속의 어머니, 성적 묘사로 점철된 여성의 이미지로 덧칠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가진 구체적인 인물들로 복원해 낸다.

여성으로서, 사회학자로서 그가 시도하는 글쓰기도 눈에 띈다.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와 그들에 대한 기억을 그는 일관된 흐름 위에 서술하지 않는다. 책 중간에 등장하는 ‘그녀’라는 설정도 그러한 장치다. 기승전결의 구도를 따르는 근대적인 이야기 방식을 탈피하고 탈중심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왔다갔다 떠올려지는 의식의 흐름은 그가 택한 글쓰기 전략. 서사를 해체한 것도 그의 일환이다.

장르의 경계 넘어 사실 같은 소설 쓰기

“이게 소설이냐 사실이냐 묻는데, 한편으론 100% 논픽션, 또 한편으론 100% 픽션이에요.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쓰느냐는 100% 창작물이죠. 그러나 우리가 소설은 곧 허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어차피 작가의 상상력 범위 내에 있는 것이고 작가의 상상력 범위라는 건 어떤 유의 경험과 기억에 기반하는 거니까.”

사회학자로서 참여관찰과 문화 기술지를 많이 써온 그에게 소설은 ‘진실을 말하기 위한 도구’다. 동시에 장르와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여성을 말하고 기억쓰기 작업을 시도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 책을 내고 제일 흥미롭게 들은 얘기는 어떤 대학생이 읽고 나니까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그냥 안 보인다는 거예요. 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가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고 제 남편도 30년 동안 같이 산 여자 머리 속에 웬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있었을까 그런 얘기를 해요. 사실 우리의 역사가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이야기화 되지 못했던 거잖아요.”

50년 전 이야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재현해 낸 그의 기억들에 압도당한다.

“최근에 기억쓰기에 관심이 많아요. 전쟁 경험에 대한 기억을 모아서 글로 쓰는 것, 글로 쓴다는 것도 씻김굿의 역할이죠. 이런 작업을 통해서 많은 여성들이 자기의 기억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형식에 구애없이 여성현장 그릴 터

그에게 역사란 곧 기억이다. 그리고 이야기다. 화상을 입은 여자들이 풀어야 할 이야기.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현재 그가 시작하는 지점이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사회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 11월 성폭력 가해자 역고소 무혐의 처분을 받은 그는 현재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주시하고 있다.

“대학 성폭력은 여성 문제만이 아니라 대학 위기의 징후라고 볼 수 있죠. 대학 구성원 절반이 여성이잖아요. 남성 교수와 딸 같은 여학생이라는 권력 관계에 문제가 불거진 겁니다.” 남성적인 사회 연줄망, 패러다임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대학 사회의 보수성에 대한 지적도 덧붙인다.

“현장을 계속 소설로 쓸 거냐 묻는데, 저는 사회학자로서 여성으로서 드라마든 소설이든 어떤 현장도 그에 적합한 형태로 쓸 생각이에요. 논문만으로는 여성들의 삶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어요.”

침묵된 역사를 기록하고 이야기시키고 침묵간의 세대의 벽을 뚫어 침묵으로 지어진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이제 그 작업을 시작한다며 이 책이 세대간 소통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임인숙 기자isim123@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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