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0일, 파리 20구 불바르 다부에 있는 국립인구문제연구소 2층의 강당에서는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젠더, 성폭력, 법제도’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가 열렸다. 150여명의 연구자와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모인 이 연구 발표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발표는 ‘프랑스 여성이 겪는 폭력에 대한 전국조사’였다. 이 조사는 노동부와 여성부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미셀 페랑(Mich le Ferrand)을 연구책임자로 하는 국립인구문제연구소의 여성연구팀, 아익 우엘(Annick Houel)을 비롯한 리옹 대학과 파리대학의 여성학 연구진 등 10명의 학자들이 참여해 이뤄진 것이다.

10명 중 1명 성폭력 경험, 심각한 스트레스 호소

반 여성운동 진영 “극력 여성운동가들의 작품” 혹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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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젠더, 성폭력, 법제도’ 주제 연구발표회.

프랑스 최초 성폭력 전국조사

이 연구는 사전 조사 연구 단계를 거쳐 2000년 20세에서 59세 사이에 해당하는 프랑스 여성 6970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한 사례 당 45분 정도로 진행된 전화 인터뷰는 철저하게 익명성을 보장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는데 많은 여성들이 처음으로 자신이 겪은 성폭력의 체험을 고백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결과가 이번에 ‘도큐망타시옹 프랑세즈’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전국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 대한 조사연구는 프랑스에서 처음 이뤄진 것이며 미국과 캐나다, 네덜란드, 스위스, 핀란드 등에서 이뤄진 기존의 연구에 비해 연구 대상이 된 폭력의 정의와 범위 그리고 형태에 있어서 더욱 광범위한 조사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조사 연구의 결과에는 기존의 통념을 깨는 내용들이 많이 나타났다. 하층 여성들이 성폭력의 빈번한 대상이 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모든 사회계층의 여성들이 고르게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 5만 명 성폭력에 희생

그리고 부부관계 안에서 10명 중 1명의 여성이 언어적, 심리적, 물리적, 성적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동안 프랑스의 언론 매체들은 아무런 조사의 근거도 없이 프랑스에 200만 명의 ‘매맞는 여성’ 이 있다고 이야기 해왔는데 조사 결과 성적인 억압이 있는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5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20세에서 25세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모든 형태의 폭력의 가장 빈번한 대상이 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연령층에 속하는 여성들 가운데 25%가 지난 12개월 안에 공공장소에서 성적 모욕을 경험하였으며 10%가 끈질긴 추근거림이나 남성들의 노출을 경험하였고 6%가 성적 폭력을 경험하였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경우 노출, 관음, 성적 접촉 등 원하지 않는 성적 침해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에서의 성폭력 가해자는 상사, 동료, 고객 등으로 나타났다. 남녀 비율이 비슷한 직장의 경우일수록 성희롱과 성폭력이 덜 빈번하게 나타났다. 연구 결과 중 가장 의미 있는 내용의 하나는 20세에서 59세 사이의 여성 가운데 한 해에 5만 명이 ‘강간’이라고 불리는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간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이에 있는 남성에 의해 이뤄지며 공공장소나 직장에서의 강간은 상대적으로 흔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의 침묵

프랑스 여성 10명 가운데 1명 이상이 일생에 거쳐 1번 이상 성폭력을 경험하는 사실도 드러났다. 또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적 접촉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여고생들과 젊은 여성들은 직접적인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이 피해자에 미치는 영향도 조사되었는데 많은 여성들이 자살을 생각하고 정신적인 고통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경찰, 여성단체, 변호사, 의사, 노동조합, 사회복지사 등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한 경우는 매우 한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성폭력 피해가 일회적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 폭로할 경우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성폭력의 가해자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남자이기 때문에 폭로하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연구 발표자들은 많은 여성들이 익명성이 보장되는 전화 인터뷰 상황에서 처음으로 그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성폭력 경험을 이야기한 것은 그만큼 피해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수치심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만큼 주위에 마음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해석했다.

이번 조사연구는 그 동안 부분적으로만 그 실상을 알 수 있었던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모를 드러내는 프랑스 최초의 대규모 조사연구였다. 연구 발표자들은 앞으로 이 연구 결과가 여성운동 단체와 정부에 의해 성폭력 예방을 위한 중요한 자료로 쓰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관보를 통해 이 연구가 공익의 증진을 위한 연구임을 승인하였다.

반(反) 여성주의에 반격하라

반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이번 조사 연구를 놓고 미국의 청교도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남자를 늑대로 만들고 여자를 피해자로 만든 극렬 여성운동가들의 작품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에서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아졌으며 이번 조사 연구가 남녀 사이의 자연스런 관계를 어색하게 만드는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마르슬라 이아큅(Marcela Iacub)과 에르베 르브라(Herv Le Bras)는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이 연구에 남성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않았으며, 전화 인터뷰를 통해 고백을 유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서로 구별되는 언어폭력, 심리적 폭력, 물리적 폭력, 성폭력을 하나로 뭉뚱그려 폭력의 진상을 흐리게 한 왜곡된 연구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사연구진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하나의 연구틀로 다룰 수 없으며, 전화 인터뷰는 방법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여성에 대한 일련의 폭력은 연속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마지막 종합토론에 여성주의 정치학자 자닌 모시-라보(Janine Mossu-Lav

eau)는 최근 새롭게 일고 있는 반여성주의 담론을 요약하면서 여성운동 진영의 확실한 반격이 요구되는 시기라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프랑스 여성인권단체연합은 여름 바캉스가 끝나는 9월 17일 반페미니스트 담론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 그리고 대항담론을 제시하는 모임을 갖겠다고 발표했다.

장미란/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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