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물 한 그릇
[에세이] 물 한 그릇
  • 구혜정 작가
  • 승인 2019.12.28 08:00
  • 수정 2019-12-26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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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bay
‘전생을 알려고 하지마라 현생이 전생이다. 후생을 알려고 하지 마라 현생이 후생이다.’ 전생과 후생에 대한 불경의 핵심적인 구절을 응용하여 썼다는 이 시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인연의 오묘함이다. 그것은 전생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의 실마리가 현생에서 풀리고 엉키고 다시 후생으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pixbay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었다.

회색 치마 흰 적삼 차림에 쪽은 찐 은발의 할머니가 힘겹게 서 있었다. 허리는 기역자로 굽어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보자마자 ”목이 마르니 물 한 대접만 주소”했다. 다리가 아픈 듯 털썩 현관 턱에 앉아 물을 달게 마신 그 분은 경상도 말씨로 불쑥 “고마배서 상을 봐주꾸마”했다

내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분은 무심히 던지듯이 말을 시작했다. “산을 통해 만났네” “연애결혼을 했네”라고 했을 때 그것이 사실이었기에 내심 놀랐다.

그분은 우리 내외의 인연에 양가 조상의 도움이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 외 시댁과의 관계와 나의 품성도 언급했고 여러가지 미래의 일도 말해주었다. 그 중에서 남편이 ‘사통팔달’로 나중에 외국에 밥 먹듯이 나가게 되고 나도 그런 남편을 만났으므로 그렇게 될 거라고 했다. 또 “이달에 삼신할매가 들었다가 비껴가고 내달에 들어서, 내년 봄에 생남을 하고 거푸 아들을 둔다”는 말도 했다.

누에가 실을 뽑듯 술술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얘기 가운데 나온 ‘기주’란 말뜻을 몰라 묻는 내게 바깥주인은 ‘대주’라 하고 안주인은 ‘기주’라 한다는 설명도 해줬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내가 “처음 봤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하고 의아해하니까 “상에 딱 써 있구마는”이라고 했다.

모든 것들이 다 내 얼굴에 적혀 있다는 말이었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엔 설악산 울산 바위 옆 ‘계조암’이라 하고선 제대로 된 인사말도 없이 떠났다.

난 무엇에 홀린 듯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큰 길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5층 우리 집에 걷기도 힘든 몸으로 찾아온 할머니의 존재가 궁금했다.

다음날 외할머니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니 일부러 그런 말을 해주려고 찾아온 사람임에 틀림없다며 대접을 잘 해 보냈으면 좋았을 거라고 하셨다. 친정어머니는 겉으로 나에게 아무 말을 안 해도 뜻밖에 연애결혼을 해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던 터라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평소 온갖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지내던 외할머니에게 이 놀라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새댁이고 세상물정을 모르고 살던 터라 부엌에 물컵이 있었건만 그분이 청한 그대로 대접에 물을 담아 쟁반에 받쳐서 공손하게 드렸다. 말 그대로 물 한 그릇만 대접해 보낸 셈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살다 보니 외국이라고는 참전 용사로 월남밖에 다녀온 적이 없고 오직’산’이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남편은 어느덧 우리나라 산악계의 대부라 불리게 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게 되었다. 나도 얼마 전 ’키프러스’에서 열린 ’2019년 세계산악연맹총회’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명예회원이 되는 남편과 동행을 했으니 옛날 그 할머니의 말처럼 외국을 내 집처럼 드나드는 ‘사통팔달’의 사람이 된 셈이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삼신할매’이야기였다. 그 할머니가 방문했던 때가 5월초였는데 그달 말에 임신 징후가 있어 병원을 찾았더니 의외로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왔다. 그러나 곧 6월에 태기가 있어 다음해 3월에 큰 아들을 낳았고 3년 후 작은 아들을 얻었다. 그녀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생활을 그림 퍼즐 맞추기로 해보면 조상에 얽힌 부분만 제외하면 그녀의 말이 조각조각 다 들어맞았다.

그런데 그동안 묻혀 있던 믿거나 말거나 할 지난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일이 2년 전 생겼다.

족보와 관련된 책을 살펴보던 작은 아들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를 등산부로 이끌어 함께 산을 다닌 선배와 나의 남편의 조상이 같은 부모(조선2대 정종 임금과 숙의 윤씨) 슬하 4형제 중 둘째(임언군)와 넷째(장청군)아들로 친형제간이라는 것이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마지막 남아있던 조상 퍼즐 한 조각이 마저 채워지는 동시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싸하게 생각해선지 몰라도 산을 다닐 성향이 아닌 내가 산을 통해 남편을 만난 일이나 집안 내력에 없던 여자로서는 최초 연애결혼 기록을 갖게 된 남편과의 인연이 천생연분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또한 ‘물귀신표 선후배’사이라고 농담하는 절친한 선배와의 만남도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에 어질 ’인仁’자가 써 있다는 그 할머니의 말처럼 어진 사람이라고 내세울 수는 없지만 남편과 함께 한 47년간 성실함과 나눔의 인생행로를 함께 걸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부심은 든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전설의 고향에나 나옴직한 신비로운 계시를 전해준 할머니 이야기와 같은 예를 달리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전생 이야기는 쉽게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에 어느 시인의 시집에서 우연히 읽었던 시의 구절이 하나 떠올랐다.

전생을 알려고 하지마라

현생이 전생이다.

후생을 알려고 하지 마라

현생이 후생이다.

전생과 후생에 대한 불경의 핵심적인 구절을 응용하여 썼다는 이 시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인연의 오묘함이다. 그것은 전생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의 실마리가 현생에서 풀리고 엉키고 다시 후생으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어떤 뜻이 있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이처럼 특이한 경험이 일어났던 걸까? 나의 인생을 예언하듯 맞춘 할머니에게 영문도 모르는 채 그저 물 한 그릇만을 대접했지만 나름대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인생은 그 할머니가 예언한대로 이루어져 나갔다. 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예언이 적중할수록 나는 물 한 그릇만을 대접한 그날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목마른 할머니에게 물 한 그릇의 의미는 결코 작은 일은 아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성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는 왜 찾기도 쉽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나에게 찾아와 내 인생의 미래를 예언하고 갔을까. 그분과 나의 인연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이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분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나의 인생의 길을 열어주려고 찾아오신 것은 분명한 일이었을 터이고 그 또한 전생과 후생을 잇는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의 조화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계조암을 찾아가서 나도 누군가에게 시원한 물 한 그릇 같은 정성을 담아 다른 사람들이 처한 힘든 일들을 풀어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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