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지도만 20년…이제는 유소년 키웁니다
프로 지도만 20년…이제는 유소년 키웁니다
  • 김진수 기자
  • 승인 2019.12.06 07:00
  • 수정 2019-12-05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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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16강 진출한 1980~90년대 스타
이른 은퇴 후 28살부터 지도자 생활
2008년 남녀테니스팀 사령탑 올라
박성희, 조윤정, 전미라 등 프로 선수 키워
지난달 만난 김일순 Han 테니스 아카데미 원장은 지난 20년간 프로 테니스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3년전부터는 이곳 아카데미에서 초·가르기초 있다. ⓒ차윤희 사진작가
김일순 Han 테니스 아카데미 원장은 지난 20년간 프로 테니스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3년전부터는 경기도 시흥시 도창동 아카데미에서 초·중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차윤회 사진작가

경기도 시흥시 도창동 조용하고 자그마한 동네에서 조그만 언덕을 올라가면 푸른색 테니스 코트가 펼쳐진다. 김일순(50) 전 삼성증권 감독이 원장으로 있는 Han(한) 테니스 아카데미다. 지난 20년간 프로에서 유망주를 키워온 그는 이제는 초·중학생 24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다.

“(프로팀에서) 코치와 감독으로 20년을 일했어요. 어린 아이를 가르면 좋겠다는 게 제 막연한 꿈이었죠.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고 주저하지 않고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엘리트 선수를 지도하다가 초등학교 선수를 지도할 수 있을지 주변에서 우려를 했는데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김 원장이 아카데미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2017년이었다. 2015년 삼성증권 테니스팀이 해체되고 나서 2년을 내리 푹 쉬었다. 코치와 감독 시절 매년 투어 대회를 돌며 9개월 간 해외에 나가 있었던 그에게 모처럼의 휴식이었다. 이곳에서 코치로 시작한 그는 올해 초 원장을 맡았다.

김 원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 초반까지 한국 여자 테니스를 이끈 에이스다. 한때 주니어 세계랭킹 3위에 올랐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복식 은메달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여자 복식과 혼합복식에서 은메달을 땄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세계무대에 김일순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대회였다. 1회전에서 세계 랭킹 42위 이노우에 에츠코(일본)를 제친 데 이어 2회전에서는 6위 헬레나 수코바(체코)를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올림픽에서 한국 테니스의 최고 성적으로 남아 있다. 1991년 영국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 여자복식에서는 금메달을 땄다.

안양초 3학년 때부터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테니스를 시작한 그는 실력이 좋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아버지가 경기도 대회 경기에 신청을 해 시합에 나가기도 했다. “연습보다 시합을 잘하고 긴장감이 있을 때 더 좋은 경기를 한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실전에 강했던 그는 안양서여자중 3학년 가을에 국가대표가 됐다. 부러운 대상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데, 그는 오히려 “수난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막내였는데 언니 선수들하고 8살 차이가 났어요. 체력 차이가 많이 나니까 훈련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정말 어떻게 운동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테니스가 ‘재미있다, 좋다, 매력있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죽기 살기로 쫒아갔어요. 태릉선수촌에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내릴까 말까 매주 고민을 했어요. 그 때 인내심을 배운 거죠.”

김일순 Han 테니스 아카데미 원장이 지난달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차윤희 사진작가
김일순 Han 테니스 아카데미 원장이 지난달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차윤회 사진작가

테니스 불모지인 한국에서 테니스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올림픽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김 원장은 스스로를 모범적이지 않은 선수라고 돌아봤다. “부상이 있으면 빨리 복귀를 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훈련도 빼먹었고요. 선수가 훈련을 하기 싫을 때는 몸이 계속 아파요. 제가 생각해도 성실하지 않았어요. 변명일 수 있겠지만 목표 의식도 없었고요. 똑같은 선수와 맞대결을 펼치는 것에 무기력한 것도 있었어요.”

김 원장의 선수생활은 길지 않았다. 26살이던 1994년 선수로서는 이른 20대 중반에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에는 KBS 라디오 리포터를 했다. 선수들을 인터뷰 하는 코너였다. 입담이 좋았던 덕분에 한 때는 프로그램을 3개까지 했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은 기회로 다시 테니스 라켓을 잡게 된다.

“2년 정도 쉬다보니 테니스가 하고 싶어졌어요. 제가 하루는 삼성물산의 주원홍 감독님을 찾아갔어요. 제가 코치로 일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러자 주 감독님이 5분 만에 ‘출근해라’고 하시더라고요.” 평소 김 원장의 실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주 감독의 배려였다.

선수로서는 목표 의식이 크게 없었던 김 원장은 코치가 되면서 진짜 테니스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도한 선수가 성장해 좋은 성적을 이뤄내는 점이 좋았다. 일주일 마다 대회 결과에 따라 선수 랭킹이 오르고 내리는 것도 김 원장의 승부욕을 발동시켰다. “지도자를 하면서 선수를 맡았다는 책임감이 있었죠. 어떻게든 지금보다 선수의 능력을 이끌어야 하잖아요. 인생의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죠.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었어요.”

삼성물산의 여자 코치로 취임한 그는 이후 박성희, 조윤정, 전미라 등의 선수를 배출했다. 코치 시절에는 연말에 여자 선수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서 선진 트레이닝을 배우고 오기도 했다. 간신히 지원을 받아 건너가 일주일에 1000달러를 지불하고 트레이닝 교육을 받았다. 동영상을 찍어와 국내에서 요긴하게 사용했다.

김 원장은 이후 삼성증권 코치를 거쳐 2008년 12월 삼성증권 테니스단 사령탑에 올랐다. 그의 나이 40이었다. 남녀를 대표하는 테니스팀에서 여성 지도자가 감독을 맡은 건 당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녀 팀에서 여자가 감독을 한다는 건 획기적이라고 하더라고요.”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테니스 국가대표팀 감독, 2014년 여자 테니스 국가대표팀 감독에 올랐다. 한국 여자 테니스의 역사에 그의 손이 거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김일순 Han 테니스 아카메디 원장이 지난달 여성신문과의 인터뷰 중 웃고 있다. ⓒ차윤희 사진작가
김일순 Han 테니스 아카데미 원장이 지난달 여성신문과의 인터뷰 중 웃고 있다. ⓒ차윤회 사진작가

무서운 지도자는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지도자로써 가장 강조한 것은 약속을 잘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경기만큼 더 강조한 것이 인성이었다. “저녁 8시 이후에는 할 이야기가 있어도 전화 안했어요. 휴가를 줘도 걱정 안했어요. 복귀할 때 다 알아서 몸을 만들어서 오더라고요.”

지도자로써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아달라고 부탁하자 김 원장은 너무 많다고 고민했다. 그는 정현이 지난해 한국 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호주 오픈 4강에 진출한 것을 선택했다. “테니스인으로써 가장 기뻤어요. 제가 살아생전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지 정도의 어려움이에요.” 정현 역시 김 원장이 삼성증권 감독인 시절 팀을 거쳐 갔다.

요즘은 사소한 걸로도 기쁘다는 김 원장. 자신이 지도했던 제자들이 아기를 데리고 오면 큰 기쁨이라고 했다. “저는 결혼을 안 해서…아이들이 저보고 ‘할미할미’ 그래요(웃음)”

그의 코치 생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르치는 연령대만 달라졌을 뿐 그의 손길에 한국 테니스사의 새로운 역사가 달려 있다.

“제가 노년에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도 보고 싶고, 그랜드슬램(호주 오픈·프랑스 오픈·윔블던·US오픈 4대 메이저대회)에서도 출전하는 한국 선수의 숫자가 많아지는 모습도 보고 싶어요. 제가 몸 관리 잘해서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동안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해 기본을 키우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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