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책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것은 참으로 멋진 경험이라고 김연수 작가가 말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었을 때 내 마음이 바로 그랬다. 이 위트 넘치는 천재 철학자의 이상과 나의 게으른 몽상이 엇비슷하다니! 그는 근면한 노동을 찬양하는 현대의 가치관을 비판하고, 하루 네 시간만 일하고 여가를 갖도록 제도를 바꾸자고 했다.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은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므로, 행복에 이르려면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의 오랜 몽상 하나는 하루의 반만 일하고 살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일을 좋아했지만 종일 하기는 싫었다. 소설도 읽고 토마토도 키우고 친구도 만나고 느긋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인생이 더 달콤할 것이었다. 그러나 느긋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는 직장은 없다. 내 머리는 늘 쏟아지는 일로 꽉 차 있었고, 내 체력과 근면성으로는 종일 근무와 여유 있는 일상의 병행이 꿈에 불과했다. 다들 열심히 사는데 나만 불만인 모양이다. 내가 심히 게으른가? 

러셀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현대문명 이전에는 생산력이 낮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부지런히 일해야 생존이 가능했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생존에 필요한 노동의 양이 줄어, 현대에는 노동력의 일부만으로도 모든 사람이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소수 특권계층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여가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네 시간만 일하면 필요한 생산량이 나오건만 여전히 여덟 시간씩 일하니 생산량이 남아돈다. 결국 망하는 공장이 생기고 노동자의 절반이 실업하게 된다. 러셀은 말한다, “이보다 더 정신 나간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는 페미니즘의 승리에 주목했다. 봉건시대 남자들은 여성은 숭고한 존재니 그에 만족하고 권력을 탐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숭고함과 권력을 다 갖기로 작정하고 이를 쟁취해 나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프로레타리아도 근면성과 여가를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가가 생기면 사람들은 과학적 호기심에 탐닉하고 예술을 즐기고 자기 분야를 더 발전시키는 연구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행복해진 사람들은 선한 본성이 되살아나 더 친절해져서 서로를 덜 괴롭히고 전쟁도 덜 할 것이라고 러셀은 기대했다. 은퇴하고 나서 나도 전보다 조금 더 친절해졌다. 누가 뭘 부탁하면 할 수 있는 것은 쾌히 해준다. “남는 게 시간인데 그러지 뭐” 하면, 다들 놀라 눈이 동그래진다. 남는 게 시간이라는 별종은 처음 본 듯이. 한창 일할 때는 이미 과로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웠다. 나는 내내 과로했고 가끔 병이 났고, 결국 조기 은퇴를 결행해 이제는 베짱이로 살고 있다.

안정적인 정규직에서 반만 일하고 월급도 반만 받는 제도는 왜 없을까. 내가 반만 받으면, 그 나머지로 반만 일하고 싶은 젊은이 하나를 더 취직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머리를 뱅뱅 돌다가 혼자만의 몽상으로 끝났다. 

몇 해 전 어느 큰 공장이 사정이 어려워져 직원의 1/3을 해고했다. 남은 직원들이 떠나는 동료들을 눈물로 보내는 것이 뉴스에 나왔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모두가 이전의 2/3만 일하고 임금을 내려서 다 같이 근무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임금삭감은 물론 어려운 문제지만 실업에야 비할 것인가. 언제든 그 실업자가 내가 될 수도 있는데. 싼 인력을 찾아 기업이 국경을 넘어 다니고 인공지능이 인력을 대체하면서 이대로는 대량실업이 불가피한 세상이 되었다.여성이, 노인이, 외국인이 일자리를 빼앗는다고도 하지 말자. 제로썸의 경쟁상대로만 서로를 보면 한쪽은 과로에 시달리고, 다른 한쪽은 실업으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일자리 나누기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모두가 조금 검소하게 그러나 안정되게 사는 게 낫지 않나. 

인류의 생산량은 지금도 넘쳐난다. 생산량을 늘리기보다 분배정의에 더 노력한다면 환경도 보호하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존경하는 러셀 선생이 힘을 실어 주니 강력하게 주장해 보겠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 좀 나누어 주고 하루 반만 일하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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